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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000410
한자 孔愉
영어음역 Gong Yu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구로구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안홍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무신
성별
대표관직 판삼사사

[정의]

고려 후기 계양도호부사를 역임한 무신.

[활동사항]

『고려사(高麗史)』의 기사를 살펴보면 공유(孔愉)의 활동에 관해 소략적이나마 파악할 수 있으나 자세히 알 수는 없다. 공유가 1270년(원종 11) 삼별초(三別抄)의 난이 일어날 당시 장군으로 출전했다는 기록으로 볼 때, 그 시기 이미 중앙에 진출했거나 특정 지역에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삼별초에 의해 금성(錦城)[현 전라남도 나주]이 7일간 공격을 당했으나, 장군으로서 이를 막지 못했다는 김방경(金方慶)[1212~1300]의 탄핵을 받고 1271년(원종 12) 관직에서 물러났다.

공유는 1272년(원종 13) 다시 기용되어 현재의 부평 지역 지방관인 계양도호부사가 되었으나, 재임 중 다시 삼별초의 습격을 받게 되었다. 이에 격렬히 저항하였으나 처자와 함께 포로가 되어 제주도까지 끌려 내려갔다. 그리하여 1년간 온갖 고초를 겪은 후 제주도가 여몽연합군(麗蒙聯合軍)에 의해 함락될 때 구출되었다.

충렬왕 때 대장군에 임명되었으며, 1278년(충렬왕 4) 원나라에서 돌아오는 왕을 제안공(齊安公) 왕숙(王淑) 등 왕족과 함께 압록강에까지 가서 호위했고, 1283년 충렬왕의 명으로 염승익(廉承益)과 함께 현화사(玄化寺)와 남계원(南溪院), 왕륜사(王輪寺)의 석탑을 수리하기도 하였다. 1284년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로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1287년 2월 동판밀직사(同判密直事)가 되고, 6월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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