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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000416
한자 河演
영어음역 Ha Yeon
이칭/별칭 연량,경재,신희,문효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구로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안홍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경상북도 산청군
성별
생년 1376년연표보기
몰년 1453년연표보기
본관 진주(晉州)
대표관직 영의정

[정의]

조선 전기 문신.

[가계]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연량(淵亮), 호는 경재(敬齋)·신희(新稀). 증조할아버지는 찬성사(贊成事)를 역임한 하즙(河楫), 할아버지는 대사헌을 역임한 하윤원(河允源)이다. 아버지는 판청주목사(判淸州牧使)를 역임한 하자종(河自宗)이며, 어머니는 정우(鄭寓)의 딸 진주정씨이다.

[활동사항]

1376년(우왕 2) 진주[지금의 경상남도 산천군]에서 태어나 일찍이 정몽주(鄭夢周)로부터 학문을 사사받고 성리학에 입문하였다. 1396년(태조 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봉상시녹사(奉常寺錄事)를 거쳐, 직예문춘추관수찬관(直藝文春秋館修撰官)이 되었고,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승정원동부대인(承政院東部大人) 등을 역임하였다. 이때 태종은 그가 간관(諫官)으로서 의연한 자세로 일을 말하는 것을 보고 손을 잡고 치사했다 한다.

1419년(세종 1) 경연참찬관으로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진강(進講)하게 되고, 1420년 주문사(奏聞使)로 사행을 다녀오게 된다. 1423년(세종 5)에는 대사헌으로서 조계종(曹溪宗) 등 불교 7종파를 선(禪)·교(敎) 양종(兩宗), 36본산으로 통합하고, 혁파된 사원의 토지와 노비는 국가로 환수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려 채택 받았다.

1425년(세종 7) 경상도관찰사로 나갔을 때 『경상도지리지』를 편찬하고 그 서문을 서술하며, 당시 『사서오경대전』 및 『성리대전』을 판각하여 그 한 부를 경상본영에 안치하였다. 이어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가 한때 천안에 유배되었으나 곧 유배에서 풀려 형조·병조의 참판을 역임하였다. 1430년(세종 12) 허조와 함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편찬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 1월 고제를 통하여 의례 연구를 주관하는 의례상정소제조를 역임하며, 2월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오르게 된다.

1436년(세종 18) 이후 의정부 우·좌참찬, 의금부제조, 예조판서, 이조판서, 의정부 우·좌찬성 등을 두루 역임하면서 공법논의[貢稅法 : 연분 9등, 전분 6등] 및 각품(各品)의 행수법(行守法) 제정에 관여하게 된다. 또한 이 시기 세종의 건강을 위하여 이천, 온양, 초정(椒井) 등의 온천으로 행차할 때 측근으로 수행하였다.

나이 70세인 1445년(세종 27) 비로소 우의정에 제수되니 영의정 황희(黃喜), 좌의정 신개(申槪) 등과 함께 삼정승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이에 경연관의 최고 직위인 영집현전경연사(領集賢殿經筵事)를 겸임하며 당시 세자 섭정을 하고 있던 문종의 스승으로도 활동했고, 좌의정을 거쳐 1449년 영의정이 되었다.

그 이듬해 영의정의 직위를 그대로 지니면서 치사(致士)한 영의정 잉령치사(仍令致仕)를 윤허 받았다. 의정부에 들어간 지 20여 년간 법을 잘 지켜 승평수문(昇平守文)의 재상으로 일컬어졌다. 1453년(단종 1)에 별세하니, 선왕인 문종의 사부였던 점을 감안하여 문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학문과 사상]

고려 말 절의파(節義派) 사대부인 정몽주의 문인이며, 조선 개국을 반대한 고려의 유신(儒臣) ‘두문동(杜門洞) 72현’ 중 한 사람인 하자종의 아들로서 절의파 사대부의 사상을 계승한 대표적인 성리학자이다. 하연의 성리학 이해 수준은 ‘효(孝)’에 대한 이해는 이미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있었으며, ‘경(敬)’에 대한 이해는 북송대 성리학자들의 의리론(義理論) 단계를 벗어나서, 남송대 주자의 『경재잠(敬齋箴)』을 수용할 정도로 선구적이었다. 즉, 하연은 고려 말 절의파 사대부인 정몽주의 의리론을 계승하여 수양론(修養論)으로 그 이해의 단계를 진전시켰다.

[저술 및 작품]

편서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誌)』와 『진양연고(晋陽聯藁)』가 있고, 1826년 합천에서 하연의 시문만을 따로 분리하여 증보·편차한 『경재집(敬齋集)』이 있다. 1451년(문종 1)에는 자신의 사상을 그대로 대변하는 『자경잠(自警箴)』을 저술했다.

[묘소]

과거 구로구 지역이었던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 산 12번지 소래산 중턱 남쪽 기슭에 있는데, 내원사 입구에서 서쪽으로 10분 거리에 있다. 묘역을 중심으로 앞 중앙에 상석과 향로석이 놓여 있으며, 우측에 묘비, 좌측에 장명등, 좌우에 문신석인과 석양(石羊) 한 쌍이 배치되어 있다. 묘는 정경부인 성산이씨와의 합장하였다. 1986년 3월 3일 시흥시 향토유적 제3호로 지정되었으며, 묘 아래에는 재사(齋舍)인 소산재(蘇山齋)가 있다.

[상훈과 추모]

태종은 그의 간관으로서의 태도가 의연함을 보고 손을 잡아주며 치하하였다고 하며, 1445년(세종 27) 70세에 우의정이 되었을 때 왕으로부터 궤장(几杖)을 받았다. 1454년에 문종의 묘정에 배향되고, 숙종 때 진주의 종천서원(宗川書院), 합천의 신천서원(新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신도비는 1940년 10월 묘소에서 동남쪽으로 약 200m 떨어진 곳에 건립하였는데, 비문은 남지(南智)가 짓고, 글씨는 김교덕(金敎悳)이 썼으며 아울러 전자(篆字)하였다. 그 뒤 1995년 묘역 입구에 새로 신도비를 세웠다. 묘역 아래에는 선생의 재사(齋舍)인 소산재(蘇山齋)와 사당인 문효사(文孝祠)가 있다. 소산재는 1455년(세조 1)에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1963년에 다시 세웠고, 1995년 재건하면서 소산서원(蘇山書院)으로 개칭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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