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토리분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000458
한자 金俊龍
영어음역 Gim Junyong
이칭/별칭 충양(忠襄),수부(秀夫)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구로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남달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무신
성별
생년 1586년연표보기
몰년 1642년연표보기
본관 원주(原州)
대표관직 병마절도사

[정의]

조선 후기의 무신.

[가계]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수부(秀夫).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김두남(金斗南)이다.

[활동사항]

김준용(金俊龍)[1586~1642]은 1607년(선조 41)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주부, 인동도호부사, 영주군수 등을 거쳤다. 전라도병마절도사로 재직하던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병사들을 이끌고 광교산에서 청나라 병사와 격전 끝에 청 태종의 사위인 백양고라(白羊高羅)의 목을 베는 등 대승을 거두었다. 1640년(인조 18) 김해도호부사가 되고 1년 만에 영남절도사가 되었으나 다음 해 병으로 사임한 후 바로 사망하였다.

[묘소]

묘소는 원래 서울특별시 강서구 화곡동에 있었으나 도시화 계획에 의해 1972년 경기도 시흥시 군자동 산198-1번지로 이전하였다. 묘역에는 봉분을 중심으로 봉분 앞에 상석과 향로석이 있고, 좌우에 동자석(童子石) 한 쌍이 서 있다. 이 동자석은 머리에 관(冠)을 쓰고 있지 않아 문신 석인이라 할 수는 없으나 도포를 입고 홀을 쥐고 있는 모양은 문신 석인과 꼭 같다. 한 단 아래에 문신 석인이 좌우에 서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충양(忠襄)으로,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1685년(숙종 11) 건립한 신도비가 묘소에서 서쪽으로 약 80m 떨어진 길가에 위치하고 있는데, 두 단의 기단석 위에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옥개석(屋蓋石)을 얹은 형태이다. 첫 번째 기단석은 땅 속에 묻혀 있어 정확한 규모를 알 수 없고, 두 번째 기단석은 높이 1.03m, 폭 72㎝, 두께 48㎝이며, 전면에 운문(雲文)과 연판문(蓮辦文)을 정교하게 새겨 놓아 세심하게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비신은 오석(烏石)으로 높이 1.4m, 폭 65㎝, 두께 22㎝ 규모이며, 옥개석은 팔작지붕 양식이다. 비문은 우의정 허목(許穆)이 짓고, 글씨와 전자(篆字)는 이조참판 오시복(吳始復)이 썼다.

경기도 수원시 하광교동 산1-1번지에 경기도 기념물 제38호인 ‘김준용 장군 전승지 및 비’가 있다. 정조 때 화성 축성에 필요한 석재를 구하러 광교산에 간 사람들에게서 병자호란 때 수원 광교산 전투에서 큰 공훈을 세운 김준용의 이야기를 들은 축성 책임자 채제공(蔡濟恭)이 암반을 갈아 ‘충양공김준용장군전승지(忠襄公金俊龍將軍戰勝地)’라 새기고, 그 좌우에 ‘병자호란공제호남병근왕지차살청삼대장(丙子胡亂公提湖南兵勤王至此殺淸三大將)’이라는 전승 내용을 새기게 했다고 한다.

[참고문헌]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