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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000561
한자 李雨臣
영어음역 Yi Usin
이칭/별칭 십탄(十灘)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구로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양윤모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생년 1670년연표보기
몰년 1744년연표보기
본관 연안(延安)
대표관직 한성부우윤|부평부사

[정의]

조선 후기 구로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

[가계]

본관은 연안(延安). 호는 십탄(十灘). 십탄이란 호는 경기도 가평에 머무를 때 근처에 12탄(灘)[개울]이 있어 붙였다고 한다. 아버지는 사복시첨정을 지낸 이성조(李成朝)이며, 어머니는 증찬성(贈贊成) 조상정(趙相靜)의 딸이다.

[활동사항]

이우신(李雨臣)[1670~1744]은 어려서부터 이희조(李喜朝)에게 수학하였다. 부제학을 지낸 이단상(李端相)의 아들인 이희조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었는데, 그 역시 송시열의 학풍을 계승하였다. 1710년(숙종 36) 40세 때에 음보로 사산감역관(四山監役官)으로 벼슬길에 나갔다. 1714년(숙종 40)부터 여러 지방관을 지내면서 백성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714년 정읍현감 때는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시행하여 풍속을 순화하였으며, 1718년(숙종 44) 인제현감 때는 세금을 감면하고 선정에 힘써 문장가인 김창흡(金昌翕)이 글을 지어 칭송하였다고 한다. 이후 대구판관·함양군수·의성현감 등을 역임하였으며, 1727년(영조 3) 3월 27일부터 1727년 10월 14일까지 지금의 구로 지역이 포함된 부평부의 부사를 지냈다.

이인좌(李麟佐)의 난 후에는 벼슬에 뜻을 버리고 경기도 가평에 내려가 생활하였다. 1731년(영조 7) 다시 관직에 나아가 사복시첨정과 원성현감, 한성부우윤, 부사직(副司直)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또한 원성현감을 지낼 때는 향약 12조문을 국문으로 번역하여 백성들이 쉽게 실천하도록 하는 등 교화에 힘썼다. 말년에는 호조참판에 제수되었으나 늙은 음관(蔭官)으로 중임을 감당할 수 없다며 사양하였다.

[학문과 사상]

문장에 능하고 특히 변려문(騈儷文)에 뛰어났다.

[저술과 작품]

1731년 사복시첨정을 지내면서 말에 관한 의서인 『마의방(馬醫方)』을 간행하여 마의(馬醫)의 이론적 배경을 굳게 하였다.

[상훈과 추모]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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