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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들의 애환을 담은 경인선과 구로역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001658
영어의미역 Gyeongin Railway and Guro Station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서울특별시 구로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손승호

[개설]

서울역에서 인천까지 연결되는 구간에는 많은 역이 설치되어 있다. 이 가운데 구로역은 서울과 인천의 정중앙은 아니지만, 대략 중간 지점에 자리하고 있던 역이었다. 그러던 것이 서울에서 수원 간의 경수선과 경인선이 분리되면서 구로역경인선의 시발점이 되었다. 1970~1980년대에는 구로공단이 번성하고 주변에 산업 단지가 들어서면서 구로역은 사람은 물론 화물의 유동량이 매우 많았으나, 근래 들어 화물 처리량은 다소 감소한 반면에 사람들의 유동량은 증가하였다.

[인천의 개항과 경인선 철도의 개통]

1876년(고종 13)에 강화도조약이 체결되고 난 후 우리나라에서는 부산·원산·인천 등 3대 항구 도시가 개항장(開港場)으로 지정되면서 외국인들에게 개방되었다. 그리하여 이들 항구를 통해 외국의 문물이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그 가운데 외국인 조계가 설치된 인천은 다국적 문화가 전파되는 전진 기지 역할을 수행하였다.

한편,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자신들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청나라를 제거하고는 조선 정부를 압박해 경인철도와 경부철도의 부설권을 손에 넣었다. 그 후 미국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이 일본의 독주에 제동을 걸면서 우리 정부는 1896년(고종 33) 경인선 철도 부설권을 미국 회사에 넘겨 버렸다. 1898년(고종 35) 일본은 자금 부족에 고전하던 미국인 모스(J. R. Morse)로부터 경인철도 부설권을 매수하여, 1899년(고종 36) 9월 18일에 노량진과 인천 사이의 경인선 철도를 개통하였다.

이렇게 하여 1899년 9월 18일 오전 9시에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에 철마가 달리기 시작하였다. 이는 일본을 비롯한 외국인들이 인천 항구를 통해 우리나라의 심장부인 서울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숨통을 터 주었고, 일본으로서는 한반도 식민지 지배를 보다 용이하게 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당시의 철도는 노량진에서 제물포까지의 80리[33.2㎞] 길을 1시간 40분이나 걸려 운행하였다. 그 당시에 서울에서 인천으로 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걸어 다녔고, 돈이 있는 사람들은 가마나 말을 타기도 하였다. 걸어서 가면 12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를 1시간 40분 만에 당도하는 것은 과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경인선은 개통 초기에 증기 기관차가 객차 6량, 화차 28량을 연결하여 매일 두 번씩 노량진과 제물포 사이를 왕복 운행하였다.

당시에 최초로 운행된 기차는 객차 3량을 단 350마력짜리 미국제 모걸(mogul) 형이었다고 전한다. 경인선 철도의 부설은 인천에서 시작하여 노량진을 지나 서울까지 이어지는 구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중간 기착 역은 인천에서부터 우각동, 부평, 소사, 오류동, 노량진 등지에 설치되었다.

[20세기 초 경인선 철도의 풍경]

초기의 경인선 열차는 나무로 만든 객차를 이용하였다. 최고급 객차는 고종 황제의 어용(御用) 객차이다. 이 객차는 일본의 평강공장에서 최고급 자재로 당시의 돈 1만 5000원을 들여 제작되었으며, 1936년까지 귀빈차로 이용되다 폐차되었다. 1915년부터는 객차가 쇠 제품으로 설계되기 시작하였다. 기차의 첫 승차권은 한자 또는 일본어로 적힌 에드몬슨식 승차권으로, 일명 ‘딱지 승차권’으로 불렸으며, 해방 전까지 사용되었다.

경인선 철도의 객실은 3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1등 객실 요금은 1원 50전으로 외국인만 이용할 수 있었으며, 80전을 내는 2등실은 내국인만 탔다. 3등실은 요금이 40전이었으며, 여자들이 이용하였다. 당시 승객의 80%는 한국인이었고, 그 가운데 80%는 3등실 손님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열차의 이용객은 개통 초기 하루 평균 300명 안팎이었으며, 시민들 대부분은 여전히 걸어서 인천과 서울을 왕래하였다. 철도가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습관처럼 해 온 관습이 하루아침에 바뀌기는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나치게 비싼 기차 요금도 문제였다. 1899년(고종 36) 당시 2등실 요금 80전이면 달걀 100개를 살 수 있었으며, 3등실 요금인 40전은 닭 2마리 값과 맞먹었다.

1900년(고종 37)에 한강철교가 완공되면서 경인철도가 완전히 개통되자 서울과 인천 간의 교류는 더욱 원활해졌으나 기선에 의한 조운업은 큰 타격을 입었다. 경인선 개통 이전에는 한강 수운이 매우 번창해 소규모 선박의 왕래가 빈번하였으나, 철도 운임과 선박 운임이 비슷해지고 일본 상인들이 철도 회사에 철도 운임 인하를 요구하면서 철도 교통을 이용한 서울로의 시장 집중은 한층 강화되었다. 이와 더불어 기존 상권의 중심지가 쇠퇴하고 철로 연변에 자리하고 있거나 철도가 통과하는 지역을 중심으로 상권이 재편되기에 이르렀다.

경인선 철도가 지나가는 길은 현재의 경인선 노선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 과거에는 오류동역에서 항동을 지나 항동저수지와 경기도농산물원종장을 경유했지만 현재는 이 노선이 아니다. 이 구간의 기찻길은 ‘항동 기찻길’이라 불리며 아직도 선로가 그대로 남아 있어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항동 기찻길은 현재 지역 주민들의 산책로 역할을 하고 있다.

구로구 오류동에는 옛날에 주막이었던 주막거리 객사가 있었다. 주막거리 객사는 경인선 철도가 개통하기 전 서울과 제물포를 왕래하는 중간 지점에 생겨난 것으로, 서울과 인천을 오가던 관원들이 쉬어 가거나 숙박을 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경인선 철도가 운행을 시작하면서 주막거리 객사는 그 기능을 서서히 상실했고, 현재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경인선의 중간에 위치한 구로구에서는 오류동경인선 철도의 중요한 기착역 역할을 하였다. 오류동역경인선 개통 당시에 설치되었으며, 여객과 화물 수송이 이루어짐에 따라 역 주변에 시가지가 발달하였다. 그러나 오류동은 경인가도에 위치한 한적한 촌락이었고 구릉도 많아 시가지가 발달하기에는 좋은 조건을 가지지 못하였다. 특히 화물의 발착에서 보면 오류동은 경제적으로 큰 발전을 이룩하지 못하였으며, 주요 화물도 쌀과 채소가 주류를 이루었다. 승객은 서울과 인천을 왕래하는 근거리 손님이 대부분이었다. 1930년대 중반 오류동역은 1년에 2~3만 명의 여객을 수송하여 경인선상에서 그다지 눈에 띄는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인천과 서울의 중간 지점, 구로]

구로구는 서울특별시의 남서부에 자리하고 있지만, 서울 대도시권의 입장에서 보면 서울과 인천을 연결하는 주요한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또한 역사적으로 구로구는 경기도 시흥군과 부천군에 속했다가 1963년에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에 편입되었다. 구로역에서부터 인천역까지는 약 28㎞이고, 서울역까지는 약 11㎞에 달한다. 따라서 물리적 거리로만 따지면 구로역은 서울과 인천의 중간 지점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구로 일대를 경인지방의 중간 지점으로 간주하고 있다. 과거 경인로가 개통되었을 때도 구로구는 서울과 인천을 연결하는 주요한 길목으로서 서울의 관문 기능을 수행했으며, 현재도 경인로 및 경인철도에서 구로구는 두 도시 간의 중간 지점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 이유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듯이, 경인선 철도가 개통되기 이전에 서울과 인천을 오가던 사람들이 쉬어 가던 곳이 주막거리 객사였다는 데서도 찾을 수 있다.

경인선 철도가 개통된 이후에는 인천이나 부천에서 서울로 진입하는 첫 번째 지점이 구로구에 설치된 오류동역이었다는 점도 또 다른 이유가 될 수 있다. 여기에다 1960년대부터 구로구에 구로공단이 조성되면서 구로구가 경인 공업 지대의 핵심 지역으로 등장하였고, 경인선의 전철화 사업이 마무리된 1974년에는 신설된 구로역이 영업을 시작하였다.

구로역신도림역오류동역 사이에 자리하고 있으며, 1973년 12월 1일 구로남신호소를 설치하고 1974년 6월 역사를 신축한 뒤, 1974년 8월 15일 수도권 전철이 개통되면서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하였다. 구로역은 현재도 서울에서 인천, 서울에서 수원으로 연결되는 철도의 분기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구로구는 서울과 인천의 중간 지점이라고 볼 수 있으며, 구로역은 한국 철도의 중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로공단의 등장과 노동자들의 유입]

구로공단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로 조성된 곳으로, 우리나라의 수출 산업을 육성하고 국제 수지를 향상시키기 위하여 1964년에 제정된 「수출산업공업단지개발조성법」에 의해 조성되었다. 즉, 서울과 인천에 조성된 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의 6개 단지 중 제1·2·3단지가 구로구에 입지한 것이다. 이는 1967년에 건설된 최초의 대규모 공업 단지였다.

이들 공업 단지는 모두 경인 지방의 유리한 공업 입지 여건 외에 공공시설, 토지 이용 및 관리, 세금, 수출입 절차 등 많은 부문에 걸쳐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수도권 전철, 경인고속도로, 경인국도 등 교통 여건이 좋아 원료의 수입과 제품의 수출에 편리하며 종업원들의 출·퇴근에도 유리한 여건을 구비하였다.

구로공단은 도시 노동자들의 땀과 애환이 담긴 공간이다. 1960년대 우리나라의 공업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서울특별시 구로구 일대에 수출 산업 단지가 들어서면서 지방으로부터 많은 노동자들이 구로공단으로 유입되었다. 구로공단구로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입지하고 있으며, 경부선 철도와 경인선 철도를 이용하면 어느 곳에서든지 손쉽게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1960~1970년대에는 봉제업, 합성수지 제품, 전자 기기 제품, 광학 기계 제품, 가발 등을 생산함으로써 숙련된 기술이 없어도 쉽게 일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1967년에 구로공단이 처음 만들어지고 서울시 외곽의 철거민과 농촌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낮은 임금에 장시간의 노동으로 한국의 산업화를 떠받친 곳이 바로 구로공단이다. 그렇지만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던 노동자들은 공돌이·공순이라는 오명, 그리고 소외와 빈곤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1974년 들어 구로역이 개통됨에 따라 역 주변에는 자연스레 상업지역이 형성되어 서민 노동자들이 퇴근길에 들러 회포를 풀 수 있는 공간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공장 노동자들은 구로역 주변을 만남의 장소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구로공단에 입지한 산업의 특성상 구로구에는 남성 노동력에 비해 여성 노동력의 유입이 두드러졌다. 1960년대 말부터 1980년대까지 구로공단 주변 지역인 구로동가리봉동의 인구 변화 추이를 분석해 보면, 이 지역에서는 남성에 비해 여성 인구가 훨씬 많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70년대 초반까지는 연간 1,000명 이상의 여성 노동력이 유입되었으며, 1970년대 후반에는 연평균 6,000명 이상의 여성 인구 증가 현상을 나타내었다.

1970년대 이후 봉제 공장 여성 근로자들이 살았던 주택은 주거 여건이 상당히 열악했는데, 그들은 대부분 방 한 칸에 부엌이 딸린 쪽방에서 생활을 이어 가야만 하였다. 공장 굴뚝에서 솟아오르는 회색빛 연기와 공단 노동자들이 기거하던 쪽방촌은 일반인들로 하여금 칙칙한 구로구를 연상시키기도 하였다. 이 쪽방촌은 구로공단의 공장들이 서울 외곽으로 이전해 나가고 구로공단의 업종이 변화하면서 여성 근로자들이 이 지역을 떠나게 된 요즘에는 마땅히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나 극빈층, 중국에서 건너온 조선족들이 거주하는 보금자리로 탈바꿈하였다.

[경인선의 복선화 및 전철화]

단선으로 운행되던 경인선은 1965년에 복선화 사업이 마무리되었다. 경인선의 복선화로 서울-인천 간 열차 운행 횟수는 기존의 45회에서 67회로 증가하였다. 열차 운행 횟수가 증가하면서 대두된 문제는 연료 문제였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디젤기관차의 에너지 문제는 연료의 수입에 의한 외화 지출 문제로 이어졌으며,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고안된 것이 전철화였다.

철도의 전철화는 철도 동력비를 대폭 절감하는 동시에 수송 효율을 증가시키는 데도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이에 정부에서는 1971년에 수도권 전철화 사업을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전철화 공사는 1974년에 마무리되었고, 이와 함께 구로역과 가리봉역의 역사가 신축되었다. 1974년 8월 15일에 수도권 전철이 개통되면서 구로구에는 구로역, 가리봉역, 개봉역 등이 설치되었다.

이때는 서울-구로 간 열차가 10분 간격으로 하루 114회 운행하였고, 구로-인천 간 열차는 20분 간격으로 하루 56회 운행하였으며 구로-수원 간 열차는 40분 간격으로 하루 27회가 운행하였다. 이로써 구로역은 서울-인천 및 서울-수원을 연결하는 중요한 길목으로 성장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구로구의 인구 증가를 자연스럽게 촉진하였다. 1986년에는 오류동 역사가 개축되었고, 1988년에는 온수역이 신축되었다. 이후 구일역이 신설되었다.

경인선의 열차 수요가 계속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1990년부터는 경인선 복복선화 작업이 시작되었다. 경인선은 약 340만 명 이상이 거주하는 인천과 부천을 서울로 연결시켜 주는 광역 전철이므로, 전철이 처리해야 할 교통량이 매우 크다. 「수도권 가구통행실태조사」에 따르면 인천과 부천에서 서울을 오가는 왕복 철도 통행량은 1996년에는 60만 통행을 약간 상회하였지만 2002년에는 100만 통행을 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따라서 복선만으로 이 많은 교통량을 모두 처리할 수 없게 되었고, 선로 용량을 확대시키기 위하여 복복선화 사업에 착수하게 된 것이다.

구로-부평 구간은 1991년 11월에, 부평-인천 구간은 1996년 9월에 각각 착공되었다. 8년간의 공사 끝에 구로-부평 구간은 1999년 1월에 개통되었고, 부평-주안 구간은 2002년 3월에, 주안-동인천 구간은 2005년 12월에 각각 개통되었다. 복복선 개통으로 4개의 철로에서 중앙의 내선에는 급행열차가 운행되기 시작하였다.

[구로공단 사업체 이전]

1970년대까지 우리나라의 산업화 전진 기지 역할을 수행했던 구로공단은 1980년대로 들어서면서 침체되기 시작하였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 수출 산업의 침체와 서울에 입지하고 있는 공해 유발 업체를 비롯한 제조업의 상당수를 서울 주변 지역으로 이전시키는 계획 때문이었다. 이 계획으로 인해 일부 업체는 경상북도 구미와 같은 지방 도시로 이전하였으며, 일부는 현재 경기도 안산시의 반월공단으로 이전하기에 이르렀다.

공장의 이전과 수출 산업의 침체는 구로구에 거주하던 공장 근로자들을 주변 지역으로 내모는 배출 요인으로 작용했으며, 근로자들이 머무르던 공간은 다른 집단의 문화에 의해 변질되었다. 가리봉동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벌집촌의 상당 부분은 고시원이나 원룸 주택 등으로 바뀌었다.

벌집촌은 한때 가출 청소년들이 본드 냄새를 진동시키던 공간이 되기도 하였고, 근래에는 중국의 조선족을 비롯하여 피부색이 다른 외국인 노동자들이 증가하면서 또 다른 모습을 선보이고 있다. 이와 함께 구로역 일대도 새로운 공간으로 재편되어 가고 있다. 아직까지 예전 서민들의 애환이 서린 공간이 남아 있기도 하지만, 구로역 교통광장과 같이 대부분은 현대 문화에 걸맞은 공간으로 변모했으며, 외국인 노동자들의 유입에 따른 다문화 공간의 면모를 조금이나마 간직하고 있다.

[서울 지하철 2호선과 7호선의 개통]

서울의 지하철 2호선은 1975년 7월에 노선이 결정된 후 1978년 3월에 착공하여 1984년 5월 22일에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지하철 2호선은 서울시의 3핵도시 계획과 맞물려 서울의 3핵[시청역, 영등포역, 삼성역]을 연결하는 순환형으로 건설되었다. 구로구에는 구로공단역·대림역·신도림역 등 3개 역이 설치되었으며, 지선에 도림천역이 설치되었다. 이후 구로공단역은 2004년 10월 1일 구로디지털단지역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지하철 7호선은 경기도 의정부시와 서울특별시 구로구 온수역을 연결하는 노선으로 1990년 12월에 착공하여 1996년 10월에 한강 이북의 노선이 개통되었고, 2000년 2월 한강 이남의 노선이 개통되었다. 7호선 전 구간이 운행을 시작한 시기는 2000년 8월 1일이다. 구로구에는 지하철 7호선대림역, 천왕역, 온수역 등이 있다.

지하철 2호선의 개통은 구로구를 서울의 강남권과 연결시켜 주었고, 지하철 7호선은 구로구에서 교통의 사각 지대에 해당하던 천왕동항동 일대를 구로구 중심 지역은 물론 서울의 중심지와 연계시켜 주고 있다. 이에 따라 구로역을 비롯하여 온수역·대림역·신도림역 등은 지하철의 환승 지점이 되었고, 역을 이용하는 여객의 유동량도 크게 증가하였다. 지하철 노선의 증가에 따라 구로역을 이용하는 승객 수는 2009년 기준으로 일일 평균 5만 명을 약간 상회하여 수도권 전철역 393개 가운데 70위를 차지하지만, 신도림역[13만 명, 9위]·구로디지털단지역[11만 명, 13위]·대림역[8만 명, 38위] 등은 이용객이 많은 편이다.

한편, 2009년 10월에는 경인선 지하화 계획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우선적으로 구로역에서부터 인천의 주안역에 이르는 구간에 대해 지하화를 추진하고, 궁극적으로는 서울역-구로역-인천역의 전 구간을 지하화하는 방안이다. 이 사업은 경기도가 제시한 수도권 광역급행철도망[GTX]과 연계하는 방식으로 구상 중이며, 사업이 성사된다면 서울을 중심으로 형성된 메갈로폴리스의 큰 변화가 예상된다.

[경인선과 구로역의 현대적 의미]

경인선은 우리나라의 수도 서울과 서울의 관문 역할을 수행하는 인천을 연결하는 기찻길이며, 오래전부터 이들 두 도시 사이에서 아주 중요한 기능을 해 왔다. 자동차 보급이 보편화되고 도로 교통 여건이 개선되었음에도 경인선은 인천을 비롯한 경기도 서부의 주요 도시에서 서울로 유입되는 사람과 물자 유동의 대동맥 구실을 담당하고 있다.

서울과 인천의 중간 지점인 동시에 경인선경부선 철로의 분기점에 해당하는 구로역과 그 주변 지역은 과거의 회색빛 이미지를 벗고, 다양한 문화 공간을 조성함으로써 서울의 서남부에서 일상생활의 중심지로 탈바꿈하였다. 구로역 일대는 예전의 공업단지 일대를 신시가지로 개발하는 계획과 맞물리면서 일부는 현대적 도시 감각에 맞는 새로운 공간으로 개조되었으며, 앞으로도 활력 넘치는 도시 공간을 창출해 낼 것으로 기대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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