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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001703
한자 口碑傳承
영어음역 Gubijeonseung
영어의미역 The Transmission of Literature by Spoken Language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서울특별시 구로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문기

[정의]

서울특별시 구로구에서 전승되어 전해 내려오는 문학.

[개설]

구비전승(口碑傳承)이란 말로 된 문학을 총칭하는 개념으로, 글로 표현된 문학인 기록문학과 구별된다. 말로 창작되고 전승되기 때문에 전승과정에서 계속 변하며, 그 변화의 누적으로 개별 작품이 존재하게 된다. 구비전승의 주요 장르로는 말[설화, 속담, 수수께끼]과 노래[민요, 판소리], 행위[민속극, 연희, 마을제의] 등을 들 수 있다. 현재 구로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고 있는 구비전승의 이야기는 설화가 중심이 되고 있다.

[구로의 설화]

1997년 구로구지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구로구지』에 따르면 구로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은 지명에 얽힌 설화, 자연물에 관한 설화, 인물에 얽힌 설화 등 3개의 이야기가 있다.

1. 「개봉동 두루미산」

개웅산매봉산을 잇는 중간 지점에 얕은 능선에 가까운 작은 산이 있는데, 이 산을 학산(鶴山)이라고 한다. 학산 앞쪽으로는 한영신학대학교가 위치해 있으며, 좌우로는 경인선 철도 및 경인로남부순환도로가 동서로 횡단하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어느 해인가 큰 장마가 졌는데 어디선가 자그마하고 둥그런 산이 물살에 떠내려 와 논 한 가운데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산에 백로가 날아와 서식했다고 해서 두루미산이라고 칭했으며, 또한 이 산의 모습이 작고 둥글다고 해서 두름산이라고도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학산은 인천에서 서울로 들어가는 주요한 길목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6·25전쟁 당시에는 유엔군이 인천과 부천을 탈환한 뒤 서울로 진격해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 구실을 하면서 이곳에서 유엔군과 북한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고 한다. 왜냐하면 학산을 점령하면 서울로 들어가는데 아무런 장애물이 없고 시야가 한 눈에 들어오는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그밖에 학산에는 1968년까지 흑연광이 있었으며, 능골에서 고척동 육본단지를 지나 개봉동으로 넘어오는 길에는 고개가 하나 있는데, 흙이 묽다고 해서 단혈(丹血)고개라고 하였다고 한다. 예전에 이곳에는 서낭당이 있었다. 이후 이 산은 예비군 훈련장으로 이용되다가, 남부순환도로가 개통되면서 마치 홀로 떨어져 나온 작은 섬과 같이 현재는 자그마한 산으로만 남아 있다.

2. 「개봉동 느티나무」

목감천 철산교 옆의 구로구 개봉3동 271-19번지에는 구로구가 보호수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이 느티나무의 수령은 약 400년 정도이며, 흉고 둘레는 385cm, 높이는 16.5m에 이르는 오래된 나무이다. 이 나무는 마을 한 가운데 위치한 노거수로서 밑부분에서 높이 3m부터는 4개의 가지로 뻗어나간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수관의 직경은 약 20m에 달한다. 현재 고사목으로 이 나무 옆에 느티나무 묘목 2그루를 식수하고 있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따르면 이 느티나무는 원래 창녕조씨의 선조가 심었다고 한다. 지금도 매년 10월 초사흘에는 종산을 옆에 모시고 있는 조상익과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이 나무에서 도당제(都堂祭)를 지내면서 마을의 안녕을 빌고 있다. 느티나무와 도당제에 얽힌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이 마을에는 갓난아이들이나 어린아이들, 그리고 젊은이들이 많이 죽어갔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조상익의 모친 꿈에 수염이 하얀 도사가 나타나 다시마를 튀겨서 산에서 고사를 지내라는 말을 하였다. 이 말대로 마을 사람들이 양곡을 거두어 고사를 지내면서 마을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또한 예전에는 사람들이 말을 타고 이 나무를 지나갈 때에는 언제나 말에서 내려 걸어갈 정도로 이 나무를 신성시하였다고 한다. 때문에 이 나무 앞으로는 말을 타고 갈 수 없었는데, 결혼식을 마친 신랑과 신부가 말을 타고 지나가다 신랑이 탄 말의 다리가 땅에 붙어 꼼짝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 후로는 사람들이 이 나무를 지나갈 때에는 항상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고 한다.

그 밖에 이 느티나무와 얽힌 이야기로는 6개 손가락을 가진 아이를 낳은 임산부의 이야기가 있다. 80여 년 전에 이 느티나무에서 제사를 지낼 때, 어느 임산부가 자신이 임신한 줄도 모르고 제사를 지내는 곳에 갔다고 한다. 그 때문에 이 임산부는 손가락이 6개인 아이를 출산하였다고 한다. 또 1945년 광복이 되던 해에 이 느티나무 옆에 있던 가죽나무가 갑자기 쓰러진 적이 있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그 이유를 몰라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어느 사람의 꿈속에 도당할아버지가 나타나 ‘고사를 다른 나무에서 지냈다’고 호통을 치는 바람에 비로소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해지고 있다.

3. 「천왕동 하정승(河政丞) 설화」

천왕고개를 넘으면 등성이가 하나 나오는데, 이 고개를 숫돌고개라고 하였다. 예전에 이 고개 일대에 숫돌이 많이 난다고 해서 숫돌고개라고 불렀는데, 이 고개를 지나면 천왕골로 들어서게 된다. 원래 천왕골세종조 때 영의정을 지낸 하연(河演)의 후손인 진주하씨 집안이 개척한 마을이었다. 하연의 5대손이며 부사과(副司果)를 지낸 하백련명종 초에 이 마을을 개척하였고, 그 아들 하경청과 하계청도 이 마을에 정착한 후 관계에 진출하였다. 이때부터 천왕동진주하씨의 집성촌을 이루면서 지금까지 15대를 이어서 내려오고 있다. 천왕골에는 하연의 묘소가 있었다고 하는데, 여기에 얽힌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옛날 천왕골이 부평 땅에 속해 있었을 때, 마을 원님이 부임하면 부임 첫 날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 일이 계속 이어졌다고 한다. 세 번째 부임한 원님도 그 다음 날 시체로 발견되었는데, 그 이유를 알 길이 없었다. 조정에서도 이 일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방책을 강구하였는데,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생각다 못한 조정은 중죄를 지어 사형선고를 받고 집행 날짜만 기다리고 있는 어느 무장을 부평의 수령으로 제수해서 보낼 것을 결정하였다. 나라에서는 어차피 죽을 사람이니 그를 보내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부임 첫날 밤 원님은 촛불을 켜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1시경이 되자 갑자기 일진광풍이 일면서 촛불이 꺼졌다. 무인 출신으로 담력이 강한 원님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기다렸다. 이윽고 방문이 열리더니 머리에 옥관자(玉貫子)를 한 선비가 나타났다. 원님은 그 모습을 보자, 이 선비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는 머리를 조아려 공손히 예를 올리며 말했다. “어인 일로 이 한 밤중에 행차를 하셨습니까?”

그러자 선비는 얼굴에 미소를 띠우며 자리에 정좌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이제야 제대로 사람을 만났군.” 그런 다음 선비는 원님에게 자신을 소개하였다. “난 신현(新峴)의 뱀내에 묻혀 있는 하연이라는 사람이오.” 이 말을 듣자, 원님은 식은땀이 나면서 등골이 오싹해졌다. 세종조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바로 몇 해 전에 세상을 떠난 문효공(文孝公) 하연 정승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하연은 한 밤중에 이렇게 나타나는 사연을 새로 부임한 원님에게 말하였다.

“내 묘역에 도벌꾼들이 들어와 나무를 마구 베어가고 있으니, 이 일을 막아 주기 바라오. 내가 이 일을 부탁하러 오면 그때마다 원님들이 혼비백산하여 죽어 나가니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소. 허나 다행이도 그대는 담력이 매우 커서 내 소원을 들어줄 수 있을 듯하니, 꼭 막아 주기를 바라오. 그대가 내 소원을 들어주면, 나 역시도 그대를 도우리라.”

하연의 말에 원님은 다음과 같이 약속하였다. “대감의 소원을 이제 알았으니, 날이 밝는 대로 즉시 시행토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아무 염려 마시고 이제 저승에서 편안히 쉬시기 바랍니다.” 원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연은 슬며시 사라졌다. 이튿날 날이 밝자, 새로이 부임한 원님의 시체를 처리할 준비를 하고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전들은 깜짝 놀랐다. 곧 바로 원님은 도벌꾼들을 잡아들여 벌을 주었다. 조정에서도 벌목을 금하고 있던 터라, 그의 공을 높이 샀다. 이 일로 원님은 과거의 죄를 용서받고 부평 마을을 잘 다스렸다고 한다.

[구비전승의 의의]

옛 사람들은 돌에다 새긴 비석보다 말에다 새긴 비석이 훨씬 더 진실하다는 생각에서 ‘석비(石碑)’에 빗대어 ‘구비’라는 낱말을 사용했던 것이다. 또한 구비가 ‘구전심비(口傳心碑)’의 준말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구비란 단순하게 말로만 전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마음에 새긴 것처럼 절실하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사용한 용어인 것이다.

최근에는 구비전승이라는 용어 대신에 말로 전해지는 문학이라는 의미에서 구비문학 또는 구전문학이라고도 한다.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문학적 형식 요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 설화, 민담, 민요, 속담, 수수께끼 등이 구전문학의 대표적인 장르에 해당된다. 내용면에서 대개 이들 장르는 생산 활동에 직접 종사하는 사람들의 삶의 내용으로 채워져 그들에게 재미와 지혜를 제공해 준다. 따라서 구로에 전해지는 구비전승의 이야기[구비문학]에는 과거 구로 지역에서 살았던 하층 민중의 의식과 생활 감정이 잘 담겨져 있다. 이처럼 구비문학은 민속 문학 또는 민중문학이라고 하기도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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