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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에서 빌딩숲으로 가리봉동 개발 이야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0B020101
지역 서울특별시 구로구 가리봉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다일

가리봉동 개발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까? 2010년 현재 생존해 있는 가리봉동의 주민들 이야기를 들어 보는 것으로 한정지으면 대략 1930년대까지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팔순이 넘는 노인들이 가리봉동에 많지 않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개발이 계속되면서 떠나갔다. 서울의 어느 지역에서나 비슷한 상황일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가리봉동에서 살아온 여러 노인들과 10여 년 전 가리봉동으로 들어온 벌집 주인, 그리고 최근에 가리봉동에서 자리를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로부터 조각조각 모아야 했다.

[18대가 면면히 살아온 집]

1932년에 가리봉동에서 태어난 박명재[1932년생] 씨는 이제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밀양박씨가 이곳에 터를 잡기 시작하고 박명재 씨가 18세손이니 적게 잡아 330여년, 많게는 500년으로 추정되는 시간을 살아온 곳이다. 박명재 씨의 말에 따르면 18대가 이어 오는 동안 집은 그 자리를 그대로 지켜 왔다.

박명재 씨는 평생 동안 가리봉동에서 살면서 딱 한 번 집을 이사 갈 궁리를 했었다. 바로 어머님의 환갑 직전이었다. 박명재 씨는 1969년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가리봉동에 공장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때다.

“어머님이 늦게까지 생존해 계셨는데, 그때 개발이 되고 그러니까 얼른 이사를 가든지 집을 짓든지 해야겠더라고요. 아마 그때가 어머니 회갑이셨어요. 그래서 어머니께 ‘전망 있는 데로 이사를 갈까요? 집을 지을까요?’ 하고 여쭤 봤더니 ‘살던 데가 좋다’ 하시면서 이사는 못가시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그 자리에 집을 다시 지었죠.”

18대를 이어오면서 가리봉동의 터줏대감 역할을 해 온 밀양박씨가 이곳을 떠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뜻이셨다. 그리하여 1969년에 집을 짓고 나서 다시 박명재 씨의 아들이 장성했을 때 다시 한 번 고쳤다.

하지만 박명재 씨도 이제 가리봉동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도 여기서 살다 죽을라고 했는데 그렇게 못 할 것 같네요.”라고 박명재 씨가 말을 꺼냈다. “가리봉동이 재개발되면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사를 가야 할 거예요,” 구로동이 재개발되면서 공장이 사라지자, 공장의 베드타운이었던 가리봉도 변화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개발에 반대하는 원주민들]

가리봉동에 오랫동안 살아온 주민들은 개발을 많이 겪었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개발, 그 처음은 일제 강점기까지 올라간다. 농사를 짓던 산골, 서울과 수원을 잇는 길이 건설되었다. 옛날 사람들은 ‘경수도로’라고 불렀다. 서울에서 연결된 도로는 지금의 구로디지털단지역을 지나 시흥을 관통했다. 하지만 겨우 트럭 두 대가 교차할 만한 좁은 길이었다. 길은 가리봉동 주민들의 논과 밭을 가로질러 뚫렸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일본군대에서 가리봉동 주민들의 밭을 강제 수용했다. 군용지로 사용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지금의 구로역에서 고대구로병원으로 향하는 길이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말기여서 일본군대가 군용지라고 지정만 해 놓고 사용하지는 않았기에 주민들은 그대로 경작을 했다. 서류상으로는 군용지였지만 주민들이 그대로 경작을 하는 땅이어서 해방과 함께 주민들에게 돌아오는가 싶었다.

해방 이후로 한동안 주민들은 그 땅을 일구며 살았다. 10여 년을 그렇게 지냈다. 당시엔 토지 등기가 명확하지 않아서 오랫동안 경작을 해 온 땅이 있으면 소유권을 인정해 줬다. 하지만 가리봉동 주민들은 혜택을 받지 못했다.

격동의 시기가 지나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혁명 정부가 들어섰다. 정부에서는 1960년대 6·25전쟁 이후 우후죽순으로 들어선 서울 도심 지역의 판잣집을 정리하고는, 구로동가리봉동 등 도시 외곽에 공영 주택과 간이 주택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이주시켰다.

가리봉동 공영 주택은 당시 군용지로 있던 곳에 만들어졌다. 또한 제1회 한국무역박람회가 개최된 이후로 구로공단이 들어서면서 가리봉동 주민들의 땅도 많이 수용되었다.

그래서 가리봉동 주민들은 개발에 반대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정부에 땅을 수용당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가리봉동의 노인들은 그저 살던 곳에서 편하게 여생을 보냈으면 하는 소망을 갖고 있다.

[정보제공]

  • •  윤재병(남, 1932년생, 구로구 가리봉동 주민)
  • •  박명재(남, 1932년생, 구로구 가리봉동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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