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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000300
한자 富平縣
영어음역 Bupyeong-hyeo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지역 서울특별시 구로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윤대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연도/일시 조선시대
시행연도/일시 조선시대
폐지연도/일시 조선시대

[정의]

조선시대 구로 지역에 설치된 행정 구역.

[내용]

부평현(富平縣)은 본래 부평도호부(富平都護府)다. 조선시대의 지방 행정 체제는 부(府), 목(牧), 군(郡), 현(縣)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부에는 부,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가 있었으며, 도호부는 인구가 밀집한 거대 읍(邑)이나 군사적 요충지에 설치되었다. 부평도호부는 서울인 한양과 가까웠고, 바다와 한강 하류 지역에 접근하기 쉬워 일찍이 군사적으로 중요한 군사 요충지로 종3품의 도호부사(都護府使)가 파견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어느 고을이 강상죄(綱常罪)나 역모죄 등에 연루되거나 그러한 인물이 나왔을 때 읍격(邑格)이 강등되곤 하였는데, 부평도호부는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세 차례 그러한 경우가 있었다. 이렇듯 부평현부평도호부가 현으로 강등되었던 기간에 한시적으로만 존재하였다. 현은 종5품의 현령(縣令)이나 종6품의 현감(縣監)이 파견된 최하위의 읍격으로 부나 군의 관할 아래 있었다.

[변천]

부평이란 지명은 1310년(충선왕 2) 여러 ‘목’을 없앨 때 종래의 길주목(吉州牧)을 ‘부’로 강등시키고 그 명칭을 부평이라 한 데서 시작한다. 부평부(富平府)는 조선조에도 그 지명이 계속 이어졌고, 1413년(태종 13) 8도제를 시행하면서 지명 개혁을 단행할 때 부평도호부가 되었다. 부평도호부는 1438년(세종 20) 임금이 부평에 온천이 있다는 말을 듣고서 여러 번 조관(朝官)을 보내어 찾았으나 아전과 백성이 숨기고 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8년 뒤에 복구되었다. 1505년(연산군 11)에는 살인 사건의 범인이 이 고장 출신이라는 이유로 1년간 부가 혁파되었다. 1698년(숙종 24)에는 인조의 아버지로 후일 추숭된 원종(元宗)의 능인 장릉(章陵)에 불을 지른 방화죄인 최필성(崔弼成)이 태어난 곳이라 하여 10년간 현으로 강등되었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7.10.23 [변천] 수정 부평도호부는 1438년(세종 20)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8년 뒤에 복구되었으며 -> 부평도호부는 1438년(세종 20) 임금이 부평에 온천이 있다는 말을 듣고서 여러 번 조관을 보내어 찾았으나 아전과 백성이 숨기고 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8년 뒤에 복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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