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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덕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000406
한자 玄德秀
영어음역 Hyeon Deoksu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구로구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안홍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무신
성별
생년 미상
몰년 1215년연표보기
본관 연주(延州)
대표관직 병부상서

[정의]

고려 후기 구로 지역에서 활동한 무신.

[가계]

본관은 연주(延州). 아버지는 연주현씨의 시조로 고려 의종 대에 장군을 지내고 명종 때 일어난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올라 연산군에 봉해진 현담윤(玄覃胤)이다. 형제로 현이후(玄利厚), 현덕유(玄德裕)가 있다.

[활동사항]

『고려사(高麗史)』 「현덕수전」에서 현덕수의 활동에 관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연주(延州) 분도(分道) 장군 김치규(金稚圭)가 개경으로 데려가 공부를 시켰다.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고 병으로 고향에 돌아갔다.

1174년(명종 4)에 서경(西京)에서 조위총(趙位寵)이 난을 일으켜 절령(岊嶺) 이북 40여 성이 조위총의 편에 섰다. 하지만 현덕수는 연주 도령(都領)인 아버지 현담윤과 함께 연주성(延州城)을 굳게 지킴으로써 주민들의 추대를 받아 권행병마대사(權行兵馬臺事)에 이어 권감창사사(權監倉使事)가 되었다.

연주성을 포위한 서경의 군대를 궤멸시키고 많은 포로와 무기를 노획하였다. 이듬해 금(金) 세종(世宗)이 장수 고라(高羅)를 원군으로 보냈으나 사양하여 돌려보내고, 스스로의 힘으로 서경의 군대를 막아내었다. 조위총의 난을 막은 공으로 내시지후(內侍祗候)가 되어 중앙 관계에 진출했다.

현덕수가 글을 올려 고신(告身)을 반납하고 과거에 응시하겠다고 청원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현재의 부평 지역 지방관인 안남도호부사로 임명되었다. 현덕수는 정사가 청렴하고 명철하였으므로 아전과 백성들이 그를 존경하고 두려워하였다. 그는 귀신을 숭상하는 것을 몹시 미워하여 금지하는 영이 심히 엄하였으므로 무당들이 그 고을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이후 내직에 들어가 도관낭중(都官郞中)을 지내고 이부낭중(吏部郞中)에 임명되었는데 간관(諫官)이 “국경 지대 출신자에게 그런 관직을 주는 것은 부당하다”는 이유로 반대하여 병부낭중(兵部郞中)으로 고쳐 임명되었다. 다시 사재소경(司宰小卿)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때 처의 양어머니가 죽은 것을 친장모라고 거짓 보고하고 복을 입은 일이 탄로나 탄핵당하고 파면되었다. 신종(神宗) 때 다시 기용되어 전중소감(殿中少監)이 되었으며 병부상서에 이르렀다. 1215년(고종 2)에 사망했다.

[학문과 사상]

현덕수는 용맹하고 국가에 대한 충성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조위총이 난을 일으켰을 때 조위총에 맞서 대항하자 조위총이 사람을 시켜 편지를 보내 투항하기를 권유하였는데, 그는 편지를 가지고 온 자를 잡아 죽이기도 했다.

[저술 및 작품]

그는 고려시대 나이가 많아 벼슬에서 물러난 인물들이 친목을 위해 사적으로 만든 모임인 기로회(耆老會)의 일원이었다. 최당(崔讜)을 중심으로 최선(崔詵)·장백목(張白牧)·고형중(高瑩中)·이준창(李俊昌)·조통(趙通)·백광신(白光臣)·이세장(李世長)·현덕수 등이 기로회를 만들어 만년을 한가롭게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인로가 서문을 쓴 『쌍명재집(雙明齋集)』에 기로회의 시문 100여 수가 적혀 있다고 한 점을 볼 때 현덕수의 작품도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될 따름이다.

[상훈과 추모]

병부상서를 역임한 뒤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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