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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000412
한자 安景恭
영어음역 An Gyeonggong
이칭/별칭 손보(遜甫),양도(良度)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구로구
시대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안홍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생년 1347년연표보기
몰년 1421년연표보기
본관 순흥(順興)

[정의]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손보(遜甫). 할아버지는 충목왕 때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안축(安軸)이며, 아버지는 조선왕조 건국에 참여하여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에 오른 안종원(安宗源)이고, 어머니는 우상시(右常侍) 김휘남(金輝南)의 딸이다. 부인은 문정공(文貞公) 정사도(鄭思道)의 딸로, 공신의 맏며느리이므로 의정택주(懿靜宅主)에 봉해졌다. 아들로 정숙공(靖肅公) 안순(安純)을 두었다.

[활동사항]

안경공(安景恭)[1347~1421]은 1365년(공민왕 14) 국자감시(國子監試)에 합격하고 산원(散員)을 거쳐 1376년(우왕 2) 의영고부사(義盈庫副使)로서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어 전리좌랑(典理佐郞), 전법좌랑(典法佐郞), 사헌지평(司憲持平) 등을 역임하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1382년(우왕 8) 경상도안렴사로 있으면서 합주(陜州)에서 사노(私奴)들이 일으킨 난을 진압하였고, 삼사좌사(三司左使)·판통례문사 진현관제학(判通禮門事進賢館提學)·판전교시사 지제교 예의판서(判典校寺事知制敎禮儀判書)를 거쳐 전법판사(典法判事)에 제수되었다. 1390년(공양왕 2) 정몽주(鄭夢周)[1337~1392]를 옹호하다가 오히려 좌천되기도 하였다.

조선왕조의 건국에 참여하여 중추원도승지(中樞院都承旨)에 제수되었다. 이후 사헌부대사헌 겸 도평의사사 보문각학사(司憲府大司憲兼都評議使司寶文閣學士)와 전라도관찰출척사(全羅道觀察黜陟使)에 임명되었다. 1406년(태종 6)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를 거쳐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가 되어 약 4개월 동안 수도 행정의 최고 책임자로 일하였다.

1410년(태종 10) 판개성부사가 되었다. 이듬해에 정탁(鄭擢), 유창(劉敞) 등 개국 공신들과 함께 1398년(태조 7) 왕자의 난 때 주살된 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의 죄를 감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1416년 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에 제수되었다.

[묘소]

묘소는 1990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4호로 지정된 순흥안씨 양도공파 묘군에 있으며, 위치는 옛 구로 지역이었던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 산126-1번지이다. 묘역에는 봉분 3기,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우던 비] 3기, 묘비 3기, 문·무관석 8기, 장명등 2기 등이 있다.

순흥안씨 양도공파 묘군에는 조선 초기 개국 공신인 양도공(良度公) 안경공(安景恭), 정숙공(靖肅公) 안순(安純), 문숙공(文肅公) 안숭선(安崇善), 소윤공(小尹公) 안숭신(安崇信), 대사헌공(大司憲公) 안숭효(安崇孝)의 묘가 조성되어 있다. 양도공 부조묘(不祧廟) 안에 대제학문(大提學門)과 공신문(功臣門)이 있고, 사당에는 흥녕부원군 양도공 부조묘라는 큰 현판이 걸려 있다. 안경공의 묘비는 높이 225㎝, 너비 56㎝로 비문은 윤회(尹淮)가 짓고 안숭선이 썼다.

[상훈과 추모]

안경공은 조선왕조의 건국에 참여하여 3등 공신으로 책봉되었다. 흥녕군(興寧君)으로 봉해졌고, 1416년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이 되었다. 조선왕조 건국에 참여한 공으로 개국 공신으로 추록되어 현재 안경공의 무덤이 있는 시흥동 일대를 사패지(賜牌地)로 받았다. 노년에 병고에 시달릴 때 태종세종이 어의(御醫)를 보내어 치료하게 하였고, 내시를 보내 병을 살피기도 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태종세종이 애도하여 조문과 치제를 후하게 하고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게 하며 시호를 양도(良度)라 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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