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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량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000445
한자 朴東亮
영어음역 Bak Dongryang
이칭/별칭 자룡(子龍),기재(寄齋),오창(梧窓),봉주(鳳洲),충익(忠翼)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구로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남달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경기도 시흥시
성별
생년 1569년연표보기
몰년 1635년연표보기
본관 반남(潘南)
대표관직 도승지

[정의]

조선 후기 시흥현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자룡(子龍), 호는 기재(寄齋)·오창(梧窓)·봉주(鳳洲). 아버지는 대사헌을 지낸 박응복(朴應福)이다.

[활동사항]

박동량(朴東亮)[1569~1635]은 1569년 시흥[현 서울특별시 구로구·금천구 및 경기도 시흥 일대] 지역에서 태어났다. 1589년(선조 22) 진사시에 합격하여 이듬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로 등용되어 검열, 호조·병조의 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좌랑으로 선조를 의주로 호종(扈從)하였다. 중국어에 능통하여 의주에 주재하는 동안 왕을 보좌해 대중(對中) 외교에 이바지하였으며, 이로 인한 왕의 신임도 두터웠다.

1596년(선조 29) 이조참판으로 동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이듬해 정유재란 때는 왕비와 후궁 일행을 호위하여 황해도 수안(遂安)에 진주하면서 민폐를 제거하고 주민들의 생활을 살폈다. 이어 연안부사·경기도관찰사·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하면서 전란 뒤의 민생 회복에 힘을 기울였다. 선조가 죽자 수릉관(守陵官)으로 3년간 수묘(守墓)하고, 1611년(광해군 3) 판의금부사가 되었으나, 일찍이 선조 때부터 한응인(韓應寅)·유영경(柳永慶)·서성(徐渻)·신흠(申欽)·허성(許筬)·한준겸(韓浚謙)과 함께 영창대군을 잘 보호하라는 부탁을 받은 이른바 ‘유교 7신’의 한 사람으로 대북파(大北派)의 질시 대상이 되었다.

1612년(광해군 4) 김직재(金直哉)의 무옥 사건이 일어나자 추관(推官)으로서 그가 무고임을 알고 연루자들을 용서하려 하다가 미움을 받고 자주 탄핵을 당하다 문외출송(門外黜送: 죄인의 벼슬과 품계를 빼앗고 한양 밖으로 추방하던 형벌)당하였다. 곧 풀려나와 복관되었으나 이듬해 계축옥사 때 모반 혐의로 심문을 받았으나 혐의가 희박하여 극형은 받지 않았다.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계축옥사 때 유릉 저주 사건이 무고임을 알면서도 시인해서 인목대비로 하여금 유폐 생활의 곤욕을 치르게 한 죄로 부안에 유배되었다. 4년 뒤 충원으로 옮겨지고, 1632년(인조 10) 고향인 시흥으로 옮겨졌다. 김상용(金尙容)·김상헌(金尙憲) 형제와 친교가 두터웠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기재사초(寄齋史草)』, 『기재잡기(寄齋雜記)』, 『방일유고(放逸遺稿)』가 있다.

[상훈과 추모]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금계군(錦溪君)에 책봉되었고,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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