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김시민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000529
한자 金時敏
영어음역 Gim Simin
이칭/별칭 면오(勉吾),충무(忠武)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구로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남달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무신
성별
생년 1554년연표보기
몰년 1592년연표보기
본관 안동(安東)
대표관직 병마절도사

[정의]

조선 전기 부평부사를 역임한 무신.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면오(勉吾).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지평을 지낸 김충갑(金忠甲)이다.

[활동사항]

김시민(金時敏)[1554~1592]은 1578년(선조 11년)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에 입사하였다. 1581년(선조 14) 지금의 구로 지역이 포함된 부평부사에 임명되었으나 구황(救荒)에 전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583년(선조 16) 이탕개(尼湯介)의 난 때 도순찰사 정언신(鄭彦信)의 막하 장수로 출정하여 공을 세운 후 1591년(선조 24) 진주판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다음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목사 이경(李璥)과 함께 지리산으로 피했다가 목사가 병으로 죽자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명에 따라 그 직을 대리하였다.

이후 김시민은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 의병장 이달(李達)·곽재우(郭再祐) 등과 합세하여 왜적을 격파하고, 패주하는 왜적을 추격하여 경상남도 진주 남쪽의 십수교(十水橋)에서 다시 승리를 거두어 고성·창원 등 여러 성을 회복하는 공을 세웠다. 이어서 의병장 김면(金沔)의 원병 요청을 받고 정병 1,000여 명을 이끌고 이에 호응, 거창의 사랑암(沙郞巖)에서 금산으로부터 서남진하는 왜적을 맞아 크게 무찔렀다. 또한 여러 차례의 전공으로 그 해 8월 진주목사로 승진되었다. 같은 해 9월에는 진해로 출동하여 적을 물리치고 적장 평소태(平小太)를 사로잡아 행재소(行在所)로 보내자 조정에서 그를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임명하였다.

이 시기 왜적은 진주가 전라도로 통하는 경상우도의 대읍(大邑)이며, 경상우도의 주력이 그곳에 있음을 알고 10월 5일 진주의 동쪽 마현(馬峴)에 출현하여 다음날부터 진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적의 2만여 대군이 진주성을 포위하자 김시민은 불과 3,800여 명의 병력으로 7일간의 공방전을 벌여 적을 물리쳤으나 이 싸움에서 이마에 적탄을 맞고 며칠 뒤에 죽었다.

[상훈과 추모]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추록되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또한 이와 함께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되었다. 경상남도 진주에 있는 충민사(忠愍祠)와 산성정충당(山城旌忠堂)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