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마산방직 구로동 편직공장 노동쟁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000993
한자 馬山紡織九老洞編織工場勞動爭議
영어음역 Masanbangjik Gurodong Pyeonjikgongjang Nodongjaengui
영어의미역 Masanbangjik Labor Difficulties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서울특별시 구로구 구로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구창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노동운동
발생(시작)연도/일시 1970년 12월 22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75년 3월 19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서울특별시 구로구 구로동
관련인물/단체 마산방직 구로동편직공장 노동조합

[정의]

1970년대 서울특별시 구로구 구로동 마산방직 구로동 편직공장에서 일어난 노동 쟁의.

[역사적 배경]

1970~1972년 마산방직 노조에 영향을 미친 유사한 노동 쟁의가 여러 차례 발생하였다. 1970년 2월 한국화이자에서 임금 인상 및 노동 조건 개선 요구 투쟁이 일어났으며, 1970년 7월에는 대한조선공사에서 임금 인상 요구 투쟁이 일어났다. 1970년 11월 전태일 분신 이후 14일 만에 청계피복 노동조합이 결성되었으며, 1971년 2월에 아이맥전자에서 임금 인상 및 노동 조건 개선 요구 투쟁을 펼쳤다.

1971년 4월에 주한 미국 대사관 경비들이 임금 인상 및 노동 조건 개선 요구 투쟁을 벌였으며 1971년 9월 15일에는 한진 파월 노동자들이 KAL 빌딩을 방화하며 격렬히 투쟁하였다. 1972년 7월에는 한국모방[원풍노방]에서 노조 민주화 투쟁을 전개하였다.

[목적]

마산방직 구로동 편직공장 노동쟁의는 다른 노동 쟁의와는 달리 여자 종업원들이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마산방직은 유급 휴일과 월차, 생리 휴가는 물론이고 퇴직금과 휴업 수당이 없었기 때문에 종업원들은 자신들의 법적인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며 노동 환경을 개선하고자 하였다.

[발단]

종업원들이 1970년 12월 22일 섬유 노조 서울 의류 지부 마산방직 분회를 결성하자 회사 측은 갖가지 부당 노동 행위를 자행하였다.

[경과]

분회 간부 및 조합원들이 1971년 1월초 회사 구내식당에서 농성을 하자, 회사 측은 불법 난동이라고 경찰에 신고하여 1월 8일 분회장과 조합원 등 13명이 노량진 경찰서에 연행되었다. 섬유노조위원장[당시 노진호]이 노량진 경찰서를 방문, 연행된 조합원들에 대한 신원 보증을 함으로써 13명 전원이 훈방되었으나, 회사 측이 다시 1월 25일에 이들을 불법 난동과 폭력 행위로 신고하여 서울 지검에 불구속 송치하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회사 측은 한영섬유 김진수 사건이 사회적으로 여론화되자, 노조를 인정함으로써 노조 분규가 일단락되었다.

[결과]

본부에서는 조직부장을 현지에 파견하여 근로기준법 위반 사항을 관계 관청에 고발하였고 1975년 1월 18일에는 부당 노동 행위 구제 신청을 하는가 하면 지부는 조직력을 총동원하여 조직 강화에 온 힘을 다하여 노사 간에 협정을 맺었다. 마산방직과 전국섬유노조 경남지부 간에 맺어진 합의 협정 내용은 다음과 같다.

‘노동조합의 조직은 여자 종업원에 한하되 남자 종업원이 임원이 되었을 때는 예외로 한다. 조직은 3월 말로 착수하여 지부 대회[1975년 4월말 예정] 시까지 일단 마무리한다. 조합비는 1%를 공제하되 4월분 임금부터 실시한다. 김영숙은 3월 3일부터 출근하며 출근 중지 기간은 유급으로 인정하고 지불 방법은 회사에 위임한다. 남자 종업원 김용억·이창섭·김상석 등에 대하여는 징계 처분을 인정하며 특별 조치로 연말 상여금과 퇴직금을 지급한다. 현재 계류 중인 노동청, 노동위원회 사항은 취하하며, 분규로 인한 사회 물의에 대해서는 지부에서 신문지상을 통하여 사과한다.’고 되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