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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봉에 얽힌 설화」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001570
한자 君子峰-說話
영어음역 Gunjabonge Eokhin Seolhwa
영어의미역 Tale of Gunjabong Summit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서울특별시 구로구
집필자 박명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설화|산악전설|복수담
주요 등장인물 유씨|스님|종의 아들
관련지명 군자봉
모티프 유형 부친을 죽인 심술궂은 노인|지관이 된 아들|명당 훼손으로 복수

[정의]

서울특별시 구로구에서 군자봉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군자봉에 얽힌 설화」는 부유하고 권세가 있으나 인심이 고약한 유씨 집안이 군자봉을 당초보다 석자 석치를 낮게 하라는 지관[유씨가 때려 죽인 종의 아들]의 말을 들어 유씨 집안의 권세가 기울어졌다는 산악전설이자 복수담이다.

[채록/수집상황]

시흥문화원 홈페이지에는 과거 구로지역의 일부가 속해있던 시흥시의 능곡동 주민 어르신들의 구전으로 전해 오는 유씨 집안의 몰락 과정을 녹취하여 정리한 「군자봉에 얽힌 설화」가 실려 있다.

[내용]

옛날 안산 땅[현 시흥시 능곡동] 한 마을에 유씨가 살고 있었다. 그 집안은 번족하기도 하거니와 아들을 14형제나 두었는데 모두가 벼슬길에 올라 권세가 대단하여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유씨 노인은 인심이 고약할 뿐만 아니라 심술궂어서 살고 있는 동네는 물론이고 인근에까지 좋지 않은 소문이 나 있었다. 날마다 동리 사람들과 다투어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게 일이었고, 집안에 있는 종들도 매일 같이 못살게 굴었다.

하루는 유씨 노인이 집안에 있는 어느 종에게 매질을 하였는데, 심한 매를 맞은 종은 매를 이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숨지고 말았다. 이때 죽은 종의 아들 하나가 16세였는데 이 광경을 목격하고 그 길로 집을 나가 길을 떠나고 말았다. 어린 나이에 화가 나서 집을 뛰쳐나가긴 했으나 갈 곳이 없었다. 이곳저곳 정처 없이 거지로 전전하면서 돌아다니다가 금강산 어느 절에 들어갔다. 절에 들어가 잔심부름을 하며 여러 해를 지내니 매사 행동이 범상치 않았다.

어느 날 절의 스님이 종의 아들에게, “너의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에 기다렸다는 듯이, “저의 소원은 풍수지리를 배워 지관(地官)이 되는 것입니다.”고 대답했다. 그로부터 스님은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가르쳐 주기를 여러 해 동안에 이 청년은 열심히 배워서 상당한 실력을 쌓게 되었다. 절에서 공부하는 동안 세월이 흘러 상당한 나이에 이르렀다. 어느 날이었다. 스님은 말하기를, “내가 아는 모든 것을 다 가르쳐 주었으니 세상에 나가 지술을 활용하여 모든 사람을 깨우치는데 힘쓰라.”고 했다.

그 길로 청년은 자기가 어렸을 때부터 살던 옛날 그 집으로 찾아가서 머물러 가기를 요청하여 그 사랑방에서 자게 되었다. 10년이 훨씬 지난 후라 그 집에서는 아무도 그 청년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청년은 그 집안 식구나 동리 사람들까지 전부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중에는 옛날 자기 아버지를 때려죽인 심술궂은 노인도 있었다. 저녁상을 물리고 사랑방에 앉아서 노인과 동리 사람들과 함께 이 얘기 저 얘기를 오고가다가 자기가 지술에 대해서는 잘 아는 체 하면서 산소 자리에 대한 이야기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앞산의 유씨네 조상 묘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유씨 조상 묘가 그야말로 명당 중의 명당지지(明堂之地)인데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앞쪽에 바라다 보이는 군자봉 산봉우리가 문제라고 했다. 그랬더니 유씨 노인은, “무엇이 문제냐?”고 바짝 다그쳐 묻는 것이었다. 이에 청년은, “군자봉 산봉우리가 석자 석치만 낮았더라도 유씨 집안은 지금보다 더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인데 참으로 안타깝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들은 유씨 집안에서는 권세와 세도가 하늘을 찌를 듯하니 군자봉 봉우리를 석자 석치 낮추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날이 밝기를 기다려 인근 사람들을 모두 오라고 하여 청년이 말한 대로 한나절 안에 군자봉 봉우리를 석자 석치를 깎아 내려 버렸다. 청년은 이에 그치지 않고 또 다른 것을 일러 주었다. 산소 밑에 있는 신도비(神道碑)를 산소 쪽으로 열 자만 끌어올려 위치를 다소 바꾸고 산소 옆에 있는 ‘벌바위’를 깨뜨려 버리되 내가 떠난 지 한나절 후에 시행하라고 이르고 그 다음날 일찍 청년은 길을 떠났다. 그 후 청년이 일러준 대로 신도비를 열자 위로 끌어 올리니 비석의 받침돌인 거북이 모양의 발이 위치한 곳에서 선혈(鮮血)이 쏟아져 나왔다. 또한 벌바위를 깨뜨리니 왕벌 두 마리가 바위틈에서 튀어 나와 청년이 간 쪽을 향하여 날아갔다.

한편 청년은 그 길로 김포나루터로 가서 용가마[무쇠 솥]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왕벌 두 마리가 날아와서 총각이 뒤집어 쓴 가마솥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머리를 쏜다는 게 무쇠를 벌침으로 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쇠 솥이 벌에 쐴 리가 없고 한참 만에 왕벌 두 마리는 기진맥진하여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총각은 벌이 죽은 것을 본 다음 솥을 벗어 놓고 김포나루를 건너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유씨 집안은 권세가 차츰 기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군자봉은 당초보다 석자 석치 정도 낮아진 것처럼 보인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모티프 분석]

「군자봉에 얽힌 설화」의 주요 모티프는 ‘부친을 죽인 심술궂은 노인’, ‘지관이 된 아들’, ‘명당 훼손으로 복수’ 등이다. 안산 땅의 권세 있는 유씨 가문의 14형제를 둔 노인의 고약하고 심술궂은 행동에 종의 아들이 지관이 되어 이르는 말을 들어 유씨 가문이 몰락했다는 복수담은 지탄 받는 삶의 말로와 바른 삶 속에 행복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참고문헌]
  • 시흥문화원(http://shculture.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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