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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명 떨친 징맹이고개 도둑」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001581
한자 惡名-
영어음역 Angmyeong Tteolchin choehyeonhuigogae Doduk
영어의미역 The Notorious Thief on choehyeonhui Pass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서울특별시 구로구|인천광역시 계양구
시대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미경B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설화|지명유래담|도적담
주요 등장인물 도적들|신건|포졸
관련지명 계양산
모티프 유형 매를 징발하는 고개의 유래|천명고개의 유래

[정의]

서울특별시 구로구에서 징맹이고개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악명 떨친 징맹이고개 도둑」은 서울특별시 구로구에 전해지는 징맹이고개[景明峴]에서 악명을 떨친 도적 이야기로서, 이들로부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 천명이 모여 함께 고개를 넘었다는 일명 천명고개에 대한 지명유래담이다.

[내용]

옛날 구로를 포함하고 있던 옛 부평부에는 크고 높은 고개가 있었다. 지금의 계양구 계산동에서 서구 공촌동으로 넘어가다 보면 계양산 주봉 서쪽에 길이가 8km에 달하는 기다란 고개가 그것인데, 이름하여 인천서 가장 크고 높다는 ‘징맹이고개’이다. 이 고개는 고려 때 유명했던 발아장(發阿場)[지금의 검암동 바름이마을]에서 가현산의 광인원(廣因院)과 통진의 조강(祖江)나루터와 풍덕(豊德)을 거쳐 바로 국영 매방이 있었던 송도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징맹이고개는 매를 징발한다고 해서 징매[徵鷹]고개라고 부르던 것이 변한 것이다. 특히 고려 충렬왕 때 이 고개는 잡초가 무성하고 솔밭이 우거진 험준한 사냥터였다. 충렬왕의 징맹이 매방에 대한 애정은 너무나 커서 계양도호부를 93년 만에 폐하고, 이곳을 참으로 길(吉)한 고을이라는 이름의 길주(吉州)라는 이름으로 고쳐 목사 고을로 한 등급 승격시키기까지 했다고 한다.

옛날에는 지형이 험준하고 숲이 무성했기 때문인지 이 고개는 도둑이 득실거려 임꺽정[林巨正]도 한 때 이 계양산(桂陽山) 징맹이고개[景明峴]에 자신의 소굴을 가지고 부하들을 훈련시켰다고도 한다.

1560년(명종 15) 부평도호부 부사로 부임한 신건(申健)은 자기가 다스리는 고을에 악명 높은 도둑들이 들끓고 있다는 것을 심히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래서 그는 어느 날 포졸들을 거느리고 이 징맹이고개의 도둑 소탕 작전에 나섰다. 그런데 부사가 포졸들을 거느리고 징맹이고개의 어구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아주 키가 작은 놈 하나가 칼을 들고 부사 앞을 가로 막으며 말하기를, “부사, 자는 범 코 찌르지 말고 큰 코 다치기 전에 어서 돌아가는 게 어떻소?” 하는 것이었다. 아주 당돌한 놈이었다. 주먹만한 놈이 안하무인이요, 방자하기 이를 데 없었던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있던 포졸들이 참다못하여 고함을 질렀다.

“이 무엄한 놈 감히 어느 어른의 앞이라고 함부로 주둥아리를 놀려대느냐?” 그러면서 포졸들이 작은 놈에게 달려들어 생포하려고 했다. 그러자 이 작은 놈은 잽싸게 몸을 빼쳐 옆 바위 위로 날아올라 앉았다. 그리고는 “하하하!” 하고 호기 있게 웃어대며 “흥, 어리석은 것들. 나를 잡아 가려고 했겠다? 어림없는 개수작 떨지 말고 너희들의 패랭이나 벗어 봐라.” 하는 것이었다.

무슨 소린가 하고 패랭이를 벗어 보았더니, 아! 이게 웬일인가? 어느새 그가 칼을 써서 그 많은 사람의 패랭이 꼭지가 모조리 잘려서 땅에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귀신이 탄복할 만한 재주였다. 이 날렵한 검술에 혼비백산한 부사와 포졸들은 도둑을 소탕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냥 도망을 쳐 산을 내려오고 말았다. 그 뒤로 징맹이고개 도둑들은 더욱 더 악명을 높여 갔다고 한다.

징맹이고개는 천명고개라고도 불렸다. 이 고개를 넘으려면 많은 사람들이 떼를 지어서 함께 넘어야만 변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징맹이고개를 항간에서는 ‘천명고개’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악명 떨친 징맹이고개 도둑」의 주요 모티프는 ‘매를 징발하는 고개의 유래’, ‘천명고개의 유래’ 등이다. 악명을 떨친 이 징맹이고개는 지리적으로 중국으로 통하는 큰 길목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계양산 북쪽 삼남지방과 개성을 잇는 중요한 통로였다는 점과, 지형이 험준하고 숲이 무성했다는 점에서 도적 이야기 발생의 최적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 이 설화는 이러한 지리적 환경을 반영하여 도적설화 혹은 의적설화의 모티프를 가지고 있다.

징맹이고개라 이름 붙여진 이유는 충렬왕 때의 매방과 관련이 깊다. 충렬왕은 고려 제25대 왕으로 그 당시는 원나라에 대한 정치적 의존도가 높았으며 원으로부터의 고려에 대한 간섭도 심했다. 결국 처형된 말기의 충렬왕은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고 사냥과 연회에 몰두했다고 한다. 이때 매 잡는 것을 임무로 하는 응방(鷹坊) 등에 소속된 관원들은 원나라의 세력을 믿고는 전민(田民)을 탈취하는 등 많은 폐해를 낳았다고 한다.

한때 징맹이고개는 홍길동(洪吉童), 장길산(張吉山)과 함께 조선의 3대 도적으로 일컬어지는 임꺽정의 활약 무대이기도 했다. 16세기 중반 조선시대 임꺽정은 몰락농민과 백정과 천인들을 규합하여 지배층의 수탈정치에 저항하며 정국을 위기로 몰아넣고는 하였다. 당시의 상황을 사관이 기록하기를, “도적이 되는 것은 도적질하기 좋아서가 아니라 배고픔과 추위가 절박해서 부득이 그렇게 된 것이다. 백성을 도적으로 만드는 자가 누구인가.” 이렇게 기록될 정도로 당시의 사회 경제적 모순이 격화됨에 따라 민중이 지배층에 대해 저항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적이 발생하는 일이 잦았다.

임꺽정은 날쌔고 용맹스러우며 지혜로워 관청이나 양반·토호의 집을 습격하거나 주요 교통로를 장악하여 정부가 농민들로부터 거두어들인 토지세·공물·진상물 등을 탈취했으며, 이것을 다시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임꺽정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상반되어 지배층은 그를 흉악무도한 도적이라고 했고, 민중들은 그를 의적이라며 영웅시했다. 물론 징맹이고개에는 임꺽정 같은 의적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민중의 피를 빨아먹는 공포의 도적들도 많았다. 따라서 천명이 함께 건너가야 할 정도였다. 이렇듯 「악명 떨친 징맹이고개 도둑」은 당시 부정부패하고 불안정한 사회현실을 반사하고 있는 이야기인 것이다.

[참고문헌]
  • 브리태니커백과사전(http://www.britannic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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