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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001662
한자 經濟的要求-政治的制度改善-要求-結合-最初-鬪爭-九老同盟罷業
영어의미역 Guro Strike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서울특별시 구로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유경순

[개설]

구로동맹파업은 1985년 6월 22일 정부가 대우어패럴 노조 간부 3인을 구속 시킨 사건을 계기로 구로 지역 노동자들이 같은 달 24일부터 6일간 벌인 투쟁이다. 구로 지역에서 5개 노조가 동맹 파업했으며 5개 노조와 그 외의 노동운동 세력 및 민주화운동 세력도 동맹 파업을 지지하는 연대 투쟁을 벌였다. 구로 지역 노동자 투쟁은 노동자들이 노동 3권 보장, 노동부장관 퇴진, 노동운동 탄압 중지 같은 정치적 요구를 내걸고 정권의 탄압에 맞선 6·25전쟁 이후 ‘최초의 정치적 동맹 파업’이었다.

[구로동맹파업의 배경]

1. 1984년의 민주노조 결성

1980년에 들어선 신군부 정권이 민주 노조들을 강제 해산 시킨 이후 구로공단에서도 노동자들이 직접 참여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노조가 없어졌다. 더욱이 신군부 정권의 임금 동결 정책과 노동운동 탄압 정책으로 구로 지역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도 더욱 열악해졌다. 예를 들면 당시 구로공단에서 가장 큰 공장이었던 대우어패럴의 경우 1984년 생산직 노동자의 월 평균 임금이 약 9만원[일당 2,850원]이었으며 이는 당시 서울 시내 대학생들의 월 평균 하숙비 12~16만원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또한 하루 10시간의 정상 근로 시간에 매일 2~8시간씩 월 평균 80~100여 시간의 연장 근로 시간이 더해졌으며, 작업 환경도 여름에는 실내 온도가 40도나 되어 20여 명에 한 대꼴인 선풍기가 온풍기가 될 정도였고 겨울에는 난방 시설이 전혀 없어 동상 환자가 속출하였다. 환기 시설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많은 노동자들이 기관지를 상하거나 심한 경우 폐결핵에 걸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이와 같은 노동 조건뿐만 아니라 관리자들의 비인격적인 대우에도 불만이 많았다. 관리자들은 현장에서 노동자들을 상대로 일방적인 욕설, 폭행, 희롱, 멸시를 일삼았고, 이에 대해 노동자들이 항의할 경우 오히려 “무식한 것들이 무얼 안다고 까부느냐”며 드러내 놓고 인격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84년 들어 정부가 일시적인 ‘자유화조치’를 취하였고 그 틈을 타고 전국에서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 투쟁을 벌이거나 노동조합을 결성하기 시작했다. 구로공단에서도 같은 해 6~7월에 대우어패럴, 효성물산, 선일섬유, 가리봉전자 노동자들이 다시 민주 노조를 세우고 사업장 안팎으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2. 지역 민주 노조 상호간 연대 활동

구로 지역 민주 노조들의 활동 중 독특한 점은 여러 노조들이 처음부터 상호간 연대 활동을 활발하게 시도했다는 것이다. 이는 1970년대 민주 노조들이 각 사업장 내에서만 활동하면서 정권의 탄압에 대해서도 개별적으로 대응함으로써 ‘각개격파’ 당할 수밖에 없었고 신군부 정권 역시 항상 민주 노조들을 탄압해서 강제 해산 시킬 것이라는 판단 속에, 이에 대한 대응책은 노조들 간의 연대가 최선이라 생각한 당시 노조 간부들의 생각 때문이었다.

연대 활동은 신생 노조로서 노조 운영을 위한 정보 교환과 자문이 필요하다는 요구에서 노조 간부들 간의 가벼운 교류로 시작됐으나 점차 노조 운동의 방향을 공유하는 것으로 발전하였다. 노조 탄압에 대한 사례 발표를 통해 여러 노조의 조합원들이 비슷하게 탄압받은 경험을 공유하고 분노하면서 노동자로서의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으며 탄압이 한 기업 차원의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면서 공동 대처 방안을 찾기도 하였다.

또한 민주 노조들은 노조 현판식 같은 기념행사나 문화 행사 같은 일상적인 활동에서도 서로 품앗이로 참여하는 연대 활동을 하면서 ‘노동자는 하나’라는 공감대를 키워가기도 했으며 조합원 숙박 교육이나 간부 숙박 교육도 같이 진행하였다. 숙박 교육에 참여한 조합원들은 공식적인 교육 일정이 끝나면 서로 간에 각자의 회사 이야기나 살아온 이야기를 하면서 밤을 지새우기도 했으며 이 과정에서 ‘너희 회사, 우리 회사’를 구분하지 않고 하나로 어울리게 됨으로써 노동자들의 일체감은 더욱 높아졌다.

이에 대해 효성물산 조합원 나윤희는 “나중에는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이 회사로부터 폭력을 당하면 우리도 뛰어가서 같이 데모도 해주고 풍물도 두드리면서 응원하고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서로 같은 입장이잖아요? 노조가 필요하고 그러면서 우리가 요구한대로 다되면 정말 좋은 세상이 올 것 같고 재미있고 좋았다”고 말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비공개로 여러 노조의 간부들이 참여하는 지역 소그룹을 만들어 학습하면서 사회를 보는 눈을 넓혀가는 지역 활동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노조들 간의 연대 활동과 지역 활동을 통해 노동자들이 상호간에 투철한 ‘연대의식’을 갖게 됨으로써 1985년 6월처럼 정부의 민주 노조 탄압에 대항하여 공동으로 맞설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될 수 있었다.

[구로동맹파업의 발단과 전개]

1. 대우어패럴 노조간부 구속사건

1985년 6월 22일 토요일 아침 9시, 라디오 뉴스에서 “대우어패럴 노조 위원장, 사무장, 여성부장이 노동쟁의조정법,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폭력 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언론기본법 등의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는 같은 해 임금 인상 이후 회사와 노조가 큰 마찰 없이 지내왔기에 갑작스런 상황이었고 구로동맹파업의 발단이 되는 사건이었다.

구속자 중 사무장 강명자는 다른 날처럼 일찍 노조 사무실을 열기 위해 나왔다가 경찰에 끌려갔으며 김준용 위원장 역시 부위원장의 전화를 받고 뉴스를 전해들은 후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노조 사무실에 출근했다가 경찰에 잡혀갔다. 그런데 정부는 왜 갑자기 노조 간부들을 구속 했을까. 1984년 들어 정부는 일시적인 자유화 조치를 통해 유화 국면을 조성하고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 틈을 타고 노동자들과 학생들의 오히려 저항이 거세어진데다 이듬해인 1985년 초에 실시된 2·12총선에서 새롭게 출범한 야당인 신한민주당이 많은 표를 얻게 되자 더욱 당황하였다. 특히 연대 활동을 활발하게 벌이면서 구로공단을 떠들썩하게 하는 민주 노조들은 정부에게 있어서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고 따라서 정부는 민주 노조를 해산시키려 했던 것이었다.

이 구속 사건에 대해 김준용 위원장은 “구로 같은 경우, 연대 활동이나 노동자들이 서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더 이상 놔두면 문제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왜냐면 노사 간에 분쟁이 있었던 때도 아니어서 우리가 구속될 타이밍이 아니었거든.”라고 회고하면서 “이 구속 사건이 구로공단 노조에 대한 탄압의 시작”이었다고 말하였다.

이 사건으로 가장 숨 가쁘게 움직인 것은 대우어패럴 노조였다. 대우어패럴 노조는 1985년 6월 23일 임시대의원대회를 열고 다음날인 24일부터 파업에 돌입하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그날 오후에는 대우어패럴, 청계피복, 효성물산, 선일섬유, 가리봉전자, 롬 코리아, 세진전자의 노조 간부들이 별도로 청계천의 한 봉제 공장에 모여 대책을 논의했으며 여기서 이 사건을 ‘1970년대에 민주 노조를 하나씩 차례로 무너뜨린 탄압 방식의 재판’으로 인식하였다.

그리고 “다른 노조도 무사하지 않을 것이기에, 1970년대와 같이 여러 민주 노조들이 각기 개별적으로 대응하다 결국 무너진 것처럼 당하지 말고 공동으로 대응하자”고 결의하였다. 이는 구로 지역의 여러 노조 간부들이 정부의 노조 탄압에 대항하여 ‘6월 24일 동맹파업’으로 맞서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2. 구로동맹파업의 전개

1985년 6월 24일 전날의 결정에 따라 대우어패럴에서 먼저 파업을 시작하였다. 이날 오전 8시, 평상시와 같이 근무 시작을 알리는 회사의 종이 울리자 부위원장 이강순이 각 과의 대표를 통해 노조원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한 후 집행부 3명이 구속된 상황을 알리고 파업에 들어가자고 제의하였다. 이에 조합원들이 일제히 사업장을 점거하면서 파업을 시작하고 “노조간부 석방하라, 민주노조 탄압마라, 노동악법 개정하라, 집시법·언론기본법 폐지하라, 노동부장관 물러나라”를 소리 높여 외쳤다.

그리고 오후 2시에는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효성물산에서도 임시 총회가 열려 조합원들이 동맹 파업의 결정과 함께 농성을 시작했으며 첫날 4개 노조 조합원 1,300여 명이 파업에 참여했다. 이중 효성물산 경우 노조 간부들이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대우 위원장이 임금 투쟁 때문에 연행됐다. 우리도 언제 탄압이 올지 모른다”며 조합원들에게 상황을 전달하였다. 이어 점심식사가 끝나는 오후 2시 임시총회를 열고 위원장이 대우어패럴 탄압을 같이 막아야 만이 효성물산 노조도 지켜낼 수 있다고 말하자 조합원들이 파업을 결정했으며 노조 간부들이 준비해 온 꽹과리, 북, 장구 등을 가지고 파업의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사물놀이도 힘차게 펼쳤다.

효성물산대우어패럴은 서로 마주보는 곳에 위치하고 있어 효성물산의 조합원들이 2층 건물 베란다로 나가 “대우, 힘내라”고 외치기도 했고, 그 소리에 건너편 대우어패럴에서는 “효성 힘내라”고 외치며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서로에게 알렸다. 효성물산의 조합원들은 취침 시간에도 대우어패럴에서 이상한 분위기가 느껴지면 모두 난간으로 나가 꽹과리 치면서 안부를 확인하였다.

가리봉전자는 사무장 윤혜련이 조합원들을 현장에 다 모이게 한 후 임시 총회를 열고 대우어패럴 노조 탄압 사건을 알리는 선전물의 배포와 함께 같이 투쟁해야 할 이유를 설명하였다. 이에 조합원들이 공동 투쟁을 결의하고 바로 파업에 들어가면서 현장 곳곳에 바리케이드를 쳤다. 당시의 파업 초기 분위기에 대해 조합원 성훈화는 “처음엔 무섭기도 했지만 재미있었어요. 또 엄청난 사명감을 온 몸으로 갖고 있었죠. 이게 결과는 어떨지 모르지만 굉장히 큰일을 하고 있다고,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을 우리가 하고 있다고 생각 했던 것 같아요”라고 회고하였다.

한편 먼저 파업에 들어간 대우어패럴의 조합원들은 같은 지역의 민주 노조들이 동맹 파업을 벌이자 더욱 힘이 났다. 조합원 이강희는 “싸우면서 힘을 준 게, 그때 효성이 바로 앞에 이렇게 보였잖아요? 공장 난간에 나와서 같이 해주는데, 와! 그렇게 먹지 못한 그 상황에서 힘이 솟더라구요. 먼 거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구호 외쳐도 들리고 꽹과리 소리, 북소리 그런 거 들으니까 무척 힘이 생겼다”고 회고 하였다.

파업을 전개하면서 노동자들은 토론, 노래대회, 장기자랑 같은 프로그램을 진행했으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조합원과 투쟁 상황을 공유하면서 대처 방향에 대해 같이 토론하는 것이었다. 또한 지칠 경우 서로의 힘을 북돋우기 위해 노래를 부르거나 열심히 구호를 외쳤다. 당시 노동자들이 가장 많이 불렀던 노래는 「선봉에 서서」, 「예성강」, 「임을 위한 행진곡」, 「돈타령」, 「못생긴 내 얼굴」, 「상록수」, 「아침이슬」 같은 노래였으며 그 외 기존 노래들을 개사해서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파업이 계속 되자 정부와 회사의 혹독한 탄압이 가해졌다. 정부는 경찰과 병력을 동원해 사업장 주위와 구로공단 요소요소에 배치해 지원 연대를 차단하려 했고 회사 측은 농성장에 대한 단전 단수와 함께 음식물을 일체 들여보내지 않아 노동자들은 주린 배를 움켜잡고 투쟁해야 했다.

효성물산의 경우, 파업 시작 첫날 밖에서 빵과 음료 등을 넣어주었으나 그 다음 날부터 경찰이 이를 막은데 이어 전기불과 수돗물까지 차단했으며 물이 안 나오니 화장실까지 막혀 농성 노동자들은 이중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는 구로공단의 회사 대표들과 경찰 당국이 모여 공동으로 모의한 결과로 드러났다.

비슷한 시기 대우어패럴에서도 회사 측이 단전 단수와 함께 음식물의 농성장 반입을 막았다. 3일째 되는 날에는 배가 고파 쓰린 배를 움켜쥔 조합원들 사이에 “지나가는 쥐라도 있으면 잡아먹고 싶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배고픔과 갈증에도 노동자들이 계속 파업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같이 싸우는 동료들에 대한 믿음과 회사나 경찰의 탄압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또한 공장의 울타리를 넘어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연대하여 싸우는 주위 노동자들의 모습도 서로에게 큰 힘이 되었다.

단전 단수에도 노동자들의 파업이 지속되자 회사 측은 「불효자는 웁니다」 같은 애잔한 음악을 틀어 노동자들의 감성을 자극하거나 부모들을 불러 끌고 가게 하려했다. 대우어패럴 조합원 강성운은 어머니가 찾아온 것이 가장 힘들 일이라고 하였다. 그는 “저희 아버지나 형이 왔을 때는 얼굴을 봤지만, 나중에 어머니가 왔을 때는 내가 일부러 뒤에 쳐 박혀서 안 나갔죠. 제일 견디기 힘들었던 거 같아요. 그동안 어머님이 공장 일을 다니시면서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고생하셨는데……. 하여튼 못 만나겠더라”고 말했다.

가리봉전자 역시 회사의 심한 탄압으로 조합원들이 불안과 분노에 떨어야 했다. 노조를 결성한 후 1985년의 임금 인상 투쟁 당시까지만 해도 회사 측의 노조에 대한 탄압은 그리 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노조가 동맹 파업을 벌이자 “너네 같은 년들이 노조를 한다고 무슨 뭐가 될 것 같냐”, “너네는 위장 취업 한 애들한테 이용만 당하는 거다”며 온갖 욕과 비방을 퍼부었고, 특히 조합원들은 성적인 욕과 위협으로 인한 심한 모욕감과 정신적 충격까지 견뎌야했다.

6월 28일, 부흥사 조합원도 노동운동 탄압에 항의하여 동맹 파업을 시작했으나 회사 측이 동원한 깡패들의 폭력으로 6시간 만에 해산되었다. 부흥사의 파업은 동맹 파업으로 고무된 주위의 노동자들이 스스로 동맹 파업 참여를 결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남성전자, 세진전자, 롬 코리아 등의 지지 농성 투쟁도 이어졌다. 그 중 롬 코리아는 대우어패럴의 파업을 알게 된 대의원들이 “우리가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되겠냐”며 위원장에게 따져서 지지 투쟁을 시작했으며 조합원들은 근무 시간이 끝나고 이틀 밤을 새면서 지지 농성을 벌였다.

구로공단 노동자들의 투쟁은 다른 지역으로 번져갔다. 삼성제약 조합원들도 농성과 점심 식사 거부로 지지를 표명했고, 저 멀리 경상남도 창원에 있는 (주)통일 노조도 지지를 표명했으며, 청계피복 노조의 노동자들도 6월 25일 구로공단에 지지 선전물을 배포한데 이어 6월 26일에는 가리봉 가두 투쟁을 주도하였다.

또한 6월 26일에는 민주화운동 세력들도 청계피복 노조 사무실과 천주교 노동사목에서 지지 농성을 벌이기 시작했으며 학생 2명이 공단 내 굴뚝 시위와 함께 전국학생총연합회 명의의 선전물을 배포하고 가리봉 가두시위에 참여하였다. 농민운동 단체들도 성명서를 발표하여 정권의 노조 탄압을 규탄하고 동맹 파업 노동자들에게 지지를 표명하였다.

구로공단 노동자들의 동맹 파업은 노조 간부 구속에 항의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사회운동 세력이 노조 탄압 중지를 요구하며 정권을 규탄하는 투쟁으로 변화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6월 29일, 대우어패럴 농성장에 학생 18명이 식량과 의약품을 갖고 들어갔다. 그러나 농성을 해체시킬 준비를 하던 회사 측이 이를 빌미로 폭력단 500여 명을 동원하여 농성자들을 강제 해산시켰다. 해산 과정에서 폭력단이 각목과 쇠파이프로 농성 노동자들을 폭행했으나 경찰은 이를 묵인하고 방관하며 폭력을 비호하였다.

이 상황에 대해 교선부장 김준희는 “6일째 되는 날, 갑자기 벽에서 툭툭~ 소리가 나면서 벽돌이 뚫리기 시작 했어요. 깨진 벽돌이 날라 오고, 구사대가 벽돌 사이를 뚫고 바리케이드를 무너뜨리며 쳐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방화수 뿌리고, 그야말로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고 회고하였다. 이어 김준희는 “갑자기 닥친 폭력으로 조합원들이 힘에 밀리자 일부는 2층 창밖으로 뛰어 내리고 일부는 안에서 짓밟혔으며 폭력단은 노동자들을 운동장으로 끌고 나와 다시 폭력으로 짓밟았고 경찰은 이들을 경찰서도 끌고 갔다”고 말하였다.

같은 날 청계피복 노조 사무실과 다른 3곳에서 지지 농성을 하던 사회운동 세력들은 대우어패럴 농성이 강제 해산되자 성명서를 발표하고 해산했으며 6월 30일에는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벌였던 효성물산 조합원 36명도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5일간의 농성을 풀었다. 6일간에 걸친 구로동맹파업의 투쟁 과정에서 구속자 43명, 불구속 38명, 구류 47명을 비롯해 해고자 1,500여 명에 이르는 대규모의 피해가 발생하였다.

[구로동맹파업의 역사적 의미]

6월 24일 시작된 구로동맹파업은 6일 동안 굶주리면서 싸운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이 강제 해산됨으로써 일단 막을 내렸다. 이 날까지 5개 사업체에서 약 1,400명의 노동자가 동맹 파업을 벌였고 5개 사업장에서 약 2,500여 명의 노동자가 지지 연대 투쟁에 참여하였다.

가두시위와 함께 구로 지역에 선전물이 대량 배포되어 공단 내 노동자들 손으로 전달됐다. 또한 노동운동 단체와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을 위시한 청년, 농민, 여성 운동 세력들이 서울을 비롯하여 전라도와 경상도에서도 지지 농성과 지지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동맹 파업을 중심으로 한 민중연대가 시도되었다.

이와 같이 1985년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구로동맹파업은 한국전쟁 이후 노동자들이 벌인 최초의 정치 투쟁이었다. 구로동맹파업은 엄혹한 독재 정권의 탄압에도 노동자들이 기업별 노조의 틀을 뛰어 넘어 정치적 연대 투쟁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또한 정부의 민주노조 탄압에 맞서 민주노조 운동의 ‘자주성’을 지키고자 한 비타협적 투쟁 정신을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구로동맹파업은 1980년대 신군부 정권의 노동운동, 민중운동의 탄압에 노동자들이 앞장서서 대항한 ‘반독재 민주화투쟁’이었으며 사회운동 세력의 적극적 지지 투쟁을 이끌어 내어 노동운동이 노동자의 직접적인 이해를 넘어 사회의 민주화를 위한 주체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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