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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001672
한자 九老勞動夜學-多文化敎育-九老敎育略史
영어의미역 History of Guro's Education
분야 문화·교육/교육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서울특별시 구로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오영훈

[개설]

야학과 다문화 교육은 소외된 계층을 위한 비제도 교육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으며 구로의 비제도 교육을 대표하고 있다. 구로공단 및 그 배후 지역은 1960년대 이후 2000년대까지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들의 삶터였다. 이러한 특성은 이 지역이 속한 구로구의 야학과 다문화 교육이라는 독특한 비제도 교육의 역사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으며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비제도 교육 기관의 산실 구로구]

1. 지역적 특성-공단에서 디지털 밸리로

구로구는 한강의 지류인 안양천을 가운데에 두고 동서 두 개 지역으로 분리되어 서울특별시의 양천구·영등포구·관악구·금천구, 경기도의 안양시·부천시·광명시와 인접하고 있으며 경인 지역을 포함하여 서울 남북을 연결하는 교통의 결절지이다. 이러한 공간적 특성은 구로구에 수출산업단지가 조성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60년대 초 논과 밭, 야산으로 이루어져 있던 구로구 지역은 서울 중심가의 재개발로 인한 난민촌을 형성하고 있었다. 1964년 제정된 수출산업공업단지개발 조성법에 기초하여 수출 산업의 육성과 국제 수지의 향상을 목적으로 1965년부터 1973년까지 1.98㎢ 부지에 우리나라 최초의 산업 단지가 구로구에 조성되었다.

구로구에 형성된 공업 단지는 서울·인천 지역에 이루어진 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의 6개 단지 중 1·2·3단지에 해당되는 곳이었다. 구로공단 지역은 주로 노동 집약적인 봉제품·합성수지 제품·전자 기기 제품·광학 기계 제품·가발 등의 산업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한국의 수출 총액이 처음으로 10억 달러를 넘어선 1977년에 구로공단 지역의 수출은 1억 달러를 넘는 기록을 수립하였다. 1980년대 중반까지 구로공단의 수출 실적은 한국 총 수출액의 10% 이상에 달했다. 1단지와 3단지를 연결하는 교각이 ‘수출의 다리’라고 이름 붙여진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하지만 1990년대 초반부터 노동 집약적 산업인 섬유와 조립 금속 업체들이 지방과 동남아, 중국 등으로 대거 이전하기 시작했다. 이후로 위상이 추락하던 구로공단은 1997년에 이르러 생존을 위한 변신을 시도하기 시작하였다. 1997년은 정부가 수도권 내 최고 입지 여건을 갖춘 구로 지역을 첨단 산업 기지로 개편한다는 목표 아래 ‘구로산업단지 첨단화 계획’을 고시하게 되면서 구로구 지역의 변화가 시작된 시점이다. 이후 고비용·저효율로 경쟁력이 약화된 제조업 단지를 벤처와 연구 개발, 정보 지식 산업 중심의 첨단 산업 단지로 구조 개편하기 위한 작업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10년, 구로공단은 검은 연기를 내뿜는 공장 밀집 지역이 아닌 강남 테헤란밸리를 연상케 하는 고층 빌딩숲의 위용을 뽐내고 있는 지역으로 변모했으며 이제 이곳 구로동에서는 과거의 구로공단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구로공단 지역이 수천 개의 IT업체가 입주해 있는 이른바 아파트형 공장들로 들어차게 된 것이다.

또한 구로공단은 지난 2000년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그 명칭을 바꾸면서 과거 공단의 이미지를 털어내게 되었다. 2004년에는 지하철 역도 ‘구로공단역’에서 ‘구로디지털단지역’으로 변경하며 이미지 변화를 가속화시켰고, ‘공단로’를 ‘디지털단지로’로 명칭을 바꿈으로써 이 변화의 과정을 완성하였다.

디지털단지는 현재 첨단 기업 7,000여 개가 입주한 대한민국의 실리콘밸리이며 오전 8시 서울지하철 2호선 구로디지털단지역에는 수백 명의 직장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그러나 역을 빠져나오는 출근 행렬은 과거처럼 작업복 차림의 행렬이 아닌 넥타이와 MP3, 휴대전화 등으로 무장한 디지털족의 행렬로 바뀌었다. 이와 함께 이 지역의 독특한 교육사를 형성했던 야학도 사라지게 되었다.

2. 소외된 사람들의 삶터 구로구 가리봉동 지역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한국 산업화의 핵이었던 서울 구로공단 지역의 근로자들은 흔히 공순이와 공돌이로 불리며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먼지 가득한 작업장에서 일에 매달려야 했다. 공단 배후 주거 지역이었던 가리봉동 일대는 이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이 지역은 서울디지털1단지와 2단지 사이에 있는 이른바 ‘벌집’이나 ‘닭장집’으로 불리던 다가구 주택들이 밀집해 있는 쪽방촌으로 구로공단 내 영세 공장 근로자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곳이다.

가리봉동에 쪽방촌이 생긴 배경은 구로공단의 전성기와 맞물린다. 1960~80년대에 가리봉동 주변에 수많은 공장단지가 형성되어 전국 각지에서 일자리를 찾아 모인 사람들이 자신과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공장노동자로 일하였다. 이들이 한 푼이라도 싼값에 방을 얻기를 원하면서 가리봉동 시장 골목을 낀 쪽방촌이 급격히 늘어났다.

1990년대 이후 영세 공장들이 이전하고 디지털단지가 조성되면서 현재는 중국 조선족 동포들과 외국인 노동자들이 그 자리를 이어받고 있다. 서울의 외곽 지역으로 집값이 싸면서도 교통이나 지리적으로 보았을 때 접근하기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 조선족 동포들이 가리봉동 지역에 터를 잡기 시작한 것은 1992년 한중 수교 후로 알려져 있다.

구로공단이 번성하던 1970년대에 쪽방촌이었던 이곳은 값이 싼 방을 찾는 조선족이 하나둘씩 정착하면서 조선족 밀집 지역으로 변했다. 『중국동포타운신문』 김용필 편집국장은 “1988년 구로공단이 사실상 사라지면서 슬럼화된 이곳을 다시 번성하게 만든 것은 바로 중국 동포였다. 가리봉동 일대는 한국 다문화 사회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 곳”이라고 말했다. 구로구에 따르면 2009년 3월 말 현재 가리봉동에 거주하는 조선족은 4,238명이나 된다. 동 전체 인구 15,620명의 4분의 1 이상이 조선족인 셈이다. 여기에 주말이면 다른 지역의 조선족까지 모여들면서 조선족 유동 인구가 1만여 명에 육박한다.

한편 디지털단지에 둘러싸여 미개발 지역으로 남아있던 가리봉동 일대 271,075㎡가 2010년부터 재개발에 들어가게 된다. 구로구는 주상 복합 빌딩과 상업 유통 시설 등을 갖춘 복합 기능 도시로 개발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제 가리봉동 일대는 전혀 다른 세상으로 변신하게 될 것이다.

가리봉시장 일대를 재개발하는 ‘가리봉균형발전촉진지구 개발사업’에 따라 가리봉동 125번지 일대 28만여 ㎡의 땅에는 서울디지털산업단지와 호텔 등이 들어서게 될 것이다. 서울중국인교회 최환규 목사는 “가리봉동 일대는 강제추방 당한 중국 동포들의 한이 서린 곳이고, 처음으로 한국과 중국의 문화가 접목되기 시작한 곳”이라며 “가리봉동의 이런 역사가 제대로 보존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3. 제도교육의 사각지대 구로공단과 그 배후 지역

한국의 산업화 시기 구로공단과 그 배후 지역은 소외된 서민들의 삶터였다. 과거 공단 지역에 거주하던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제도권 교육에서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가난한 농촌의 딸들이었던 여성 노동자들은 적은 임금으로 인해 야근, 특근 등을 합쳐 거의 하루 종일 일해야 했고 이렇게 해서 번 돈은 주로 농촌의 부모님을 위한 농자금이나 오빠나 남동생의 학비로 충당되었다.

배움을 갈망했지만 자신들은 초등 교육을 겨우 마치거나 그 마저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어린 여성 노동자들의 고단한 삶 속에서 제도 교육의 혜택은 너무 멀리 있었다. 이러한 제도 교육의 사각 지대를 메워 온 것이 일제강점기 이래 오랜 전통을 지닌 비제도 교육의 대명사 ‘야학’이었다.

[노동운동의 전초기지 구로구 노동야학]

1. 야학발달사-노동야학이 성립되기까지

근대적 국가 형태로 넘어가던 조선 말기 야학은 민중의 교육적 욕구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운동과 교육운동의 접목으로 태동했다. 우리나라에서 야학이 뿌리내린 지는 100년이 넘었으며 최초의 야학은 1906년의 함경남도 보성야학이다. 근대적 학문을 수용한 지식인들은 민중 계몽을 위해 야학을 개설했다. 반면에 민중은 근대적 국가로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생존 전략으로 야학을 선택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국권 침탈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야학의 숫자는 전국적으로 5,000여 개에 달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야학들이 문맹 퇴치를 명분으로 내걸었지만 야학 설립의 근본적인 목적은 독립 의식과 민족의식 고취였다.

해방 뒤 야학은 정부 및 민간 차원 양쪽에서 결성되었다. 1950년대 각 대학에는 정부 지원 하에 농촌계몽운동반이 생겨났으며 1960년대 들어서는 민간 주도의 야학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의 야학은 검정고시 준비를 위한 ‘검시야학’[검야]이었다. 1960년대 가속화된 산업화는 공단 등을 중심으로 도시 빈민과 노동자들의 집단 거주지를 형성했다. 야학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주경야독 생활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1960년대 야학이 제도권 교육의 보완 기능을 담당했던 반면 1970년대 야학은 ‘생활야학’, ‘노동야학’ 등의 이름으로 소외된 계층의 의식을 개혁을 지향했다. ‘생활야학’은 농민과 도시 빈민들의 소외 문제에 관심을 가졌으며 검정고시 야학의 낮은 합격률, 노동자의 실제 현실 적응 등을 염두에 두며 차별성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한편 ‘노동야학’은 도시 노동자들의 계급의식 고양에 주력했으며 주로 도시 빈민이 거주하는 지역과 노동 현장에서 생성되었다.

2. 대안적 교육 방법 실천의 장 노동야학

구로구는 공단 지역이라는 특성상 노동야학들이 많이 형성되어 있었다. 백합성격구락부, 수산나회의 자매복지원, 새얼의 집, 유네스코야학, YWCA야학, 구로제일야학, 한민교회야학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 야학들은 1979년 5월 서울시 교육위원회가 비인가 사설 강습소라는 이유로 폐쇄되었다. 그 외에 구로공단가리봉동 지역에는 이름도 없는 골방야학들도 있었다.

노동야학에 나오는 노동자들은 주야로 계속되는 노동으로 시간을 낼 수 없었기 때문에 검정고시 합격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노동야학은 주요 학습 과목은 검정고시 준비를 위한 과목 보다는 한문, 노동법, 정치 경제 등 시사에 관한 기본 교양 등이었다. 따라서 당시 노동자들은 노동야학을 통해 스스로의 권익을 찾기 위해서는 노동자라는 자신의 처지를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배움을 통해 자신들의 권리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또한 노동자끼리 서로 아끼고 단결해서 사회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도 노동야학의 중요한 교육 목표의 하나였다. 따라서 당시 노동야학은 노동자들의 의식화를 통해 노동운동의 중추 세력을 만들어내는 기능을 담당했다. 그러나 그것만이 목표는 아니었고 노동야학은 진보적이고 대안적인 교육적 실천을 위해 노력하는 장이었으며 노동운동이자 교육운동이었다.

[구로구의 야학]

1. 생활야학의 계승자 섬돌야학

『한국야학운동사: 자유를 향한 여정 110년』을 쓴 작가 천성호는 구로구의 섬돌야학에 대한 추억으로 그의 글을 시작한다. “제가 처음 구로동 지하에 위치한 섬돌야학을 찾아간 때가 1994년 봄이었습니다. 어두운 불빛을 따라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갔지요. 그렇게 야학을 시작했습니다. 습기는 차있고, 곰팡이 냄새는 가득했습니다. 판자와 나무로 대충 두 칸을 나누고, 소파 몇 개로 교무실을 만든 초라한 야학이었습니다. 그러나 누추하고 비루한 야학이었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야학에는 웃음이 있었고, 따뜻함이 있었고, 서로에 대한 아낌이 있었습니다. 야학은 우리에게 현실 너머에 존재하는 파랑새와 같이 희망이 가득한 곳이었습니다.”[12쪽]

1992년에 개원한 섬돌야학은 생활야학으로 현재까지 야학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섬돌야학 사정을 성광야학의 정현미 강학[교사]을 인터뷰한 글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섬돌야학은 교무가 없다. 강학들은 대게 대학생이나 직장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로 중등 과정을 개설하고 있는 섬돌야학은 하루 3교시 주 5일 수업을 했다. 국어·영어·수학 두 시간씩, 사회·과학·한문 한 시간씩, 시사·교양, 학생·교사회의가 한 시간씩으로 시간표가 배정되어 있다. 수업 교재는 교과서를 사용하기도 하고 강학이 임의대로 다른 교재를 선정하기도 한다. 국사 수업에는 ‘역사신문’을 교재로 사용하고 있다. 영어는 생활 영어 위주로 수업을 한다.

생활야학을 표방하는 섬돌야학은 검정고시 준비를 따로 하지 않았다. 시험 때에 맞춰 원서를 대신 접수해주기는 하지만 시험에 대비해 문제집을 풀어주거나 요점 정리를 해주지는 않았다. 정말 검정고시를 원하는 학강[학생]들에게는 근처에 있는 신명야학을 소개해 주기도 했다.

섬돌야학은 입시 위주의 단순 암기 교육에서 벗어나 야학 고유의 교육 철학을 실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시사·교양 수업은 통일이나 인권 문제를 주제로 토론 수업으로 진행하기도 하고 학강들이 자신의 직업이나 전문 분야를 직접 설명하기도 한다. 학강들이 대부분이 토론 수업을 부담스러워하고 종종 수업을 빼먹기도 하지만 반응은 좋은 편이다.

강학들은 적어도 일주일에 세 번 나온다. 수업이 없는 날에는 여러 가지 잡일을 하든지 모여서 교재 연구를 한다. 강학들은 보통 일 년을 고비로 그만둔다. 정현미 강학은 이렇게 잦은 강학들의 이동으로 인해 야학에 관한 논의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음을 걱정했다. 야학은 점점 쇠퇴하고 있다. 그러나 야학을 운영하는 강학들은 한명이라도 배우겠다는 학강이 있으면 수업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한다.

야학은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일제강점기에 야학은 민족 계몽의 기수 역할을 했으며 산업화의 그늘 아래 잊혀진 노동자들에게는 배움과 의식화의 장을 제공했다. 그러나 100년의 역사를 지닌 오늘의 야학은 재정적 어려움과 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그 명맥이 끊어지고 있다. 1세기 동안 야학은 배움의 터전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국가가 하지 못하는 서민들의 학습권을 보장해 주는 중요한 기관이었다.

2. 구로구 노동야학과 함께한 사람들

한얼야학은 교육운동가 이상호가 1970년대 후반 영등포에 있던 봉제 공장인 우남산업에서 시작하여 구로성당으로 옮기면서 구로 지역 노동 운동을 주도했던 구로구의 대표적인 노동야학이다. 또한 한얼야학은 1978년 윤상원, 박기순, 신영일 등이 시작한 들불야학과 그 뿌리를 같이하며 당시 한얼야학을 거쳐 간 많은 사람들은 노동운동과 노동조합 결성의 밑거름이 되기도 하였다.

농민운동가 송창욱도 한얼야학을 거쳐 간 사람이다. 송창욱은 1961년 고흥군 동강면 마륜리 마동마을에서 태어나 1995년 서른다섯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뜰 때까지 올곧게 자신의 삶을 살았다. 1980년 전남대학교 불문과에 입학하여 대학신문의 기자로 활동했고 1983년에는 대학을 휴학하고 해병대에 자원 입대했으며 1985년 5월에 제대하고 복학을 하면서 바로 ‘야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가난 때문에 배우지 못한 청소년들과 열악한 환경에 처한 노동자들을 위해 헌신하는 길을 택하여 ‘한얼야학’ 4기의 팀장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송창욱과 함께 야학 운동에 참여했던 친구 조응현은 그를 자신에게는 철저한 원칙주의자였지만, 동료들에게는 열린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진보신당의 공동대표였던 심상정 역시 한얼야학과 연을 맺은 정치인이다. 심상정은 1979년 겨울 구로공단 야학을 시작하면서 노동 현장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이후 실제로 구로공단의 여공이 되어 관념으로만 알았던 노동자의 삶을 몸으로 느끼며 살게 되었다. 심상정은 세 번째 직장인 대우어패럴에서 미싱사로 일하던 중 노동조합의 결성을 주도하였다.

1984년 9개의 죄목으로 수배 중이었고 1985년 6월에는 이후 노동운동의 중요한 전기가 된 구로동맹파업의 주동자로 지명 수배되었으며 1993년 임신한 상태로 법정에 불려나가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2004년 4월 민주노동당 창당 이후 4년 만에 국회에 입성했으며 진보 정당의 첫 국회의원으로서 서민의 소리를 대변해야하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

그러나 2006년 민주노동당은 지방 선거에서 참패했고 심상정은 17대 대통령선거 민주노동당 당내 경선에 “민주노동당 쇄신”을 외치며 참가했으나 아쉽게 패배하였다. 이후 당 쇄신의 기회를 잃은 심상정은 패권적 당 운영을 개선하기 어렵다고 여기고 노회찬 등과 함께 민주노동당의 한계를 뛰어넘어 평등과 평화, 생태와 연대의 가치를 실현하고자 진보신당을 창당하고 새로운 도전의 길에 나섰다.

심상정은 처음에는 ‘야학해서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다는 거냐’하고 야학 활동에 의문을 가졌다. 그러나 그녀는 구로구에서의 야학과 공활을 통해 절대 다수의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무관심과 소외의 대상임을 깨닫게 되었다. 야학은 그녀가 노동운동에 헌신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외에도 구로구의 야학을 거쳐 현재도 소외된 이들을 위해 노력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이와 같이 구로구의 야학은 지식인과 소외된 사람들을 이어주는 가교와도 같은 것이었다. 또한 지식인과 노동자 두 계층의 막힌 소통구를 열어주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지금은 사라져 가는 야학의 전통은 그 형태를 달리해서라도 유지해야 하지 않을까?

[야학의 전통을 이어받은 다문화 교육]

1. 다문화 교육을 통한 다문화 사회의 정착

최근 한국 사회는 외국인 노동자와 국제결혼 이주자들이 늘어나면서 다인종, 다문화 사회로 변화하고 있으며 다문화 가정의 수도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다문화 가정의 급증은 교육의 영역에 새로운 사회 통합의 과제를 부가하고 있다. 다문화 가정에 속하는 사람들은 소수로 한국 사회에 적응해야 하는 어려움을 안고 있으며, 과거 구로공단의 노동자들처럼 저소득층을 형성하고 있다. 가리봉동 지역의 주민의 다수를 차지하는 다문화 가정들은 과거 공단 근로자들과 마찬가지로 교육에서도 소외된 계층을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다문화 교육과 인권 보호이다.

2. 구로구 다문화 교육의 본거지 지구촌노동자인권센터

김해성 목사가 대표로 있는 구로구 가리봉1동의 지구촌노동자인권센터는 외국인 근로자들에게는 희망과 꿈을 주는 곳이다. 이곳에는 외국인 근로자들을 위한 상담센터, 다문화 방송국, 신문사, 식당, 병원, 신학대학 등이 모여 있는 거대한 본부이다. 이 곳 식당에서 하루에 식사를 하는 외국인은 1천여 명이 넘으며 과거 공단 지역 노동자들이 살던 벌집에는 이제 중국 동포들이 모여 살고 있다. 이곳을 연변동이라고 부를 정도로 중국 식당과 가게들도 1천여 개나 들어서 있다.

지구촌노동자인권센터에서는 다문화 가정의 어린이를 위한 다문화센터 방과 후 학교, 어린이학교 등의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세계 최고의 사교육비를 기록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공교육의 혜택조차 누리지 못하는 아이들도 있으며 공교육 현장에서도 역사나 문화적인 차이로 적응이 어려운 아이들도 있다.

예를 들면, 몽골인 이주노동자 자녀 중에는 학교에서 뛰어난 성적을 내며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냈지만, 국사 시간에 대몽항쟁과 삼별초의 항쟁을 배운 후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한 경우도 있었다. 수업이 끝난 후 사이좋게 지내던 친구들이 “그때는 너희 나라에 졌지만, 이제는 우리가 더 잘살고 몽골을 이길 수 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몽골 출신 어머니를 둔 다문화 가정 자녀들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내용이다. 이와 같이 공교육 현장에서 상처받은 아이들을 다독여 줄 수 있는 곳이 바로 지구촌노동자인권센터와 같은 비제도 교육 제도이며 교육에서 소외된 노동자들이 야학을 통해 아픔을 달랬듯이 이제는 다문화 가정이 그 혜택을 받고 있다.

과거 구로구에 산재해 있던 야학들이 노동자의 인권 옹호를 위한 전초 기지였다면, 지구촌노동자인권센터는 이민자 노동자 인권 옹호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외국인근로자들이 김해성 목사를 찾아와 자신들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제도권에서 소외된 이들을 교육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구로구의 독특한 교육사의 현장인 것이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심** 해방 이후 '빈민과 교육'이라는 관점에서 정규교육과 대안교육의 명백한 차이과 효과를 발견 할 수 있는 자료를 잘 보고 갑니다. 해방이후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은 가슴아픈 현실 이었습니다.
죄와 악에 가득하게 살아가는 세상에서, 만인이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섭리로 이민족을 높이어 쓰시고 계심을 감사합니다. 불쌍한 백성을 높여주신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2011.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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