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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0A010203
지역 서울특별시 구로구 구로3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윤정

1970년대 연기를 내뿜는 ‘굴뚝 공장’은 구로공단[정식 명칭은 구로수출산업공업단지]의 대표 이미지에 다름없었다. 1990년대만 하더라도 굴뚝 공장이 남아 있던 구로동은 2010년 현재 구로디지털단지[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완벽하게 탈바꿈해 그야말로 상전벽해를 실감케 하는 곳이 되었다.

[교통 편의의 이점을 안고 들어선 구로공단]

1960년대 현 구로3동 지역은 영등포에서 시작해 수원으로 가는 국도가 근접해 있었다. 영등포역과 약 5㎞, 인천항과는 약 25㎞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서 원부자재 수송에서도 다른 어느 지역보다 큰 지리적 이점이 있었다.

1967년 공단이 조성되자 공장 입주 유치와 지원책이 뒤따르는 가운데 31개 기업체가 구로공단에 입주했다. 이후 1972년 구로공단 2단지, 1976년 구로공단 3단지가 조성됐다.

당시 구로공단의 주력 사업은 노동 집약적인 경공업이었다. 제1·2수출공업단지가 가동된 1969년에는 섬유[40.3%] 및 가발[20.4%] 업종이 산업 단지 전체 수출액의 60% 이상을 차지했다.

1970년대 이후 전기와 전자의 수출액이 전체 30%를 넘어섰지만, 1980년까지 구로공단 수출액의 50% 이상을 차지하던 것은 섬유·잡화 등의 경공업이었다.

[1970년대, 열악했던 업무 환경이 낳은 풍경들]

노동 집약적 산업이 밀집되다 보니 부작용도 많았다. 수출 물량을 맞추기 위해 10대의 어린 여성 노동자들도 하루 14~16시간을 근무하기 일쑤였다. 선일섬유노동조합위원장이었던 김현옥 씨는 서해문집에서 펴낸 『내일을 여는 역사』에서 “한창 바쁘게 돌 때면 새벽 4시 퇴근이 예사였다. 저녁 8시 퇴근은 꿈도 못 꿨다. …… 휴일도 한 달에 첫째·셋째 일요일뿐이었고…… 일당은 하루 130원에서 140원이었다.”고 쓰고 있다. 1970년대 편도 시내버스 요금이 10원이었다.

이렇듯 열악한 업무 환경 때문에 구로공단에서는 줄곧 노동 운동이 일어났다. 가장 눈에 띄는 노동 운동은 ‘6·25전쟁 이후 최초의 동맹 파업’이라 불리는 ‘구로 동맹 파업’이었다.

1985년 대우그룹 계열사인 대우어패럴 노조 간부가 연행되자 대우어패럴은 물론 구로공단 1단지에 입주했던 효성물산가리봉전자, 선일섬유 노조원 1000여 명이 파업에 들어갔다. 이와 같은 구로공단의 동맹 파업은 1970년대 이후 노동 운동사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연대 투쟁이었다는 데 의의를 지니고 있으며, 이후 노동자 주도의 노동 운동 단체들이 활발하게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동맹 파업 과정에서 모두 43명이 구속되고, 연인원 370명이 구류를 살았으며, 700여 명이 강제로 사표를 쓰거나 해고당했다.

[1980년대, 침체기로 들어선 구로공단]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구로공단은 활기를 잃기 시작했다. 1962년 수출 실적 5480달러에서 시작해 1977년 100억 달러를 기록하면서 15년 만에 20배 가까운 성장을 이뤘지만, 세계 경제의 침체와 선진국의 ‘신무역보호주의’에 따른 수출 부진, 그리고 중화학 부문에 대한 중복 과잉 투자로 인해 수출 산업이 점차 침체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임금 상승과 함께 산업 구조가 변화되면서 업체들은 값싼 노동력을 찾아 중국으로 공장 이전을 진행했다. 1992년과 1993년 두 해 동안에만 구로공단에서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등 해외로 생산 공장을 옮긴 업체가 42개나 생겨났다. 수도권 산업 분산 정책이 진행되자 그나마 있던 공장들도 수도권으로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후 정부는 1995년 재래식 공단을 최신식 첨단 공단으로 재개발할 수 있도록 「공업 배치 및 공장 설립법 시행령 개정안」을 시행했다. 그리고 다행히 이를 통해 구로공단은 점차 첨단 산업 기지로 변모하게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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