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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0A020101
지역 서울특별시 구로구 구로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윤정

“그때는 오히려 비행 청소년이 적었어요. 글 모르는 사람도 야학에 오지만 검정고시를 봐서 더 나은 직장에 가려는 학생도 많았죠. 연령대도 천차만별이었어요.” 1987년부터 2년 동안 천주교구로3동성당에서 운영했던 ‘보스꼬근로청소년학교’에서 교감으로 재직했던 최상남[1949년생] 씨의 설명이다.

구로공단’이란 단어가 옛말이 된 지금 ‘야학’이란 단어 역시 낯설게만 느껴진다.

[1970~1980년대 도시 노동자의 꿈을 키우던 곳, 야학]

한반도에 야학이 생겨난 지도 어언 100년이 넘는다. 1906년 함경남도 함흥군 신중면에 국내 최초 야학인 보성야학이 설립된 이후 2년여 만에 전국적으로 5000여 개의 야학이 생겨났다. 1960년대 야학은 제도권 교육을 보완하며 도시 빈민과 노동자들의 주경야독의 터전이 됐다.

1967년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구로공단이 어느 정도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구로동 지역에도 야학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야학은 농민과 도시 빈민, 그리고 구로공단 같은 곳에서 일하는 도시 노동자들의 삶 속에 깊이 파고들었다. 제18대 한나라당 국회의원 원희룡[1964년생] 씨는 책 『나는 서브쓰리를 꿈꾼다』에서 “공단에서 일하는 여학생들이 하나둘 교실 문을 밀고 들어왔다. 쭈뼛거리며 들어오는 수줍은 가득한 앳된 얼굴들이 나를 황홀케 했다.”라고 말하고 있다. 실제 구로공단에서 일했던 제17대 국회의원 심상정[1959년생] 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블로그[http://blog.daum.net/simsangjung/11158048]에서 “12, 13살 어린아이들이 산업체 특별학교에서 밤에는 공부하고 쉬지 못하는 바람에 낮에 일하다가 잠깐만 졸아도 프레스에 손이 오징어처럼 눌리기도 했다.”며 노동 운동에 뛰어든 이유를 밝히고 있다.

[200곳이 넘었던 구로공단 야학]

1970년대 구로공단 내에 몇 개의 야학이 꾸려지고 있었는지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다. 노동 운동에 뛰어든 대학생들이 공장에서 일을 하며 야학을 꾸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서울과 경기 지역 야학인 모임인 ‘야학21’에 따르면 1970년대 말 서울 시내에는 200여 개의 야학이 있었다고 한다.

1970년 구로공단에는 다양한 야학이 존재했다. 1971~1977년까지 운영된 고등공민학교의 경우, 초등학교 졸업자를 대상으로 중학교 과정을 6개월간 이수케 하고 검정고시를 치러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도록 지도했다. 그러나 고등공민학교는 근로자들의 학력이 높아지고 취업 희망자들이 감소하는데다 1977년 산업체특별학급이 문을 열면서 폐교됐다.

산업체특별학급은 낮에는 직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학교에서 공부하는 방식이었다. 초기에는 구로공단과 인접한 대방여자중학교와 영등포여자고등학교, 영등포공업고등학교, 북인천여자중학교,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등 5개교에 총 935명이 입학했고, 1993년까지 총 1만 5466명의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이 외에도 검정고시 교육 기관인 공단청소년학원을 비롯해 근로여성 교양대학, 공단직업훈련원 등 다양한 교육 시설이 존재했다.

최상남 씨가 교감으로 재직했던 보스꼬근로청소년학교는 원래 경찰서에서 운영하던 남서울직업학교를 구로3동성당에서 인수하여 운영하던 야학이었다.

최상남 씨는 “40~50명의 학생이 한 반이었는데 4~5개 반까지 있었어요. 학생들은 청소년부터 40~50대까지 다양했고요.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 수업을 들었죠. 교사들은 현직 교사도 있었고 대학생도 있었고요. 대부분 차비만 받거나 아니면 무료 봉사로 학생들을 가르쳤어요.”라고 회상했다. 그런데 남서울직업학교 때는 경찰서에서 운영했기 때문에 회사에서 학생들의 편의를 잘 봐 줬지만 성당에서 운영하기 시작하자 오히려 학생에게 불이익을 주었고, 학생들이 견디지 못하자 결국 1989년에 폐교하기에 이른다.

[구로공단은 사라졌지만 야학은 여전히 소외 계층의 배움터]

1990년대로 들어서면서 야학은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1994년 3월 25일자 『경향신문』에는 「호황 누리던 ‘벌집’ 빈방 수두룩-유흥업소 폐업 속출, 야학도 시들」이란 기사가 실렸다. “[중략]…… 최근 변화의 바람은 인력난 및 고임금 등을 이유로 중국이나 동남아 등 해외로 진출하는 업체들이 늘어나는 데서 비롯되고 있다. 지난 92, 93년 두 해 동안 구로공단에서 중국이나 동남아 등 해외로 생산 공장을 옮긴 업체는 42개나 된다 ……[중략]……1980년대 민주화 바람을 타고 늘어났던 노동 관련 단체와 ‘야학’이 문을 닫고 있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변화이다. ‘노동자대학’, ‘노동종합학교’ 등 노동자 교육 프로그램이 폐쇄되고 50여 명 이상이 북적대던 각 야학도 참가 학생이 없어 속속 문을 닫고 있다.”는 내용이다.

현재 구로동에는 ‘섬돌야학’ 한 곳이 남아 있다. 섬돌야학은 원래 종교 단체가 운영하던 곳이었는데, 1991년 이선권 씨가 인수했다.

섬돌야학에서는 현재 주부와 청소년 10여 명이 수업을 듣고 있다. 섬돌야학 대표 이선권[1971년생] 씨는 “예나 지금이나 야학은 배움의 기회를 놓친 사람들이 꿈을 펼칠 수 있는 곳이죠. 올해부터는 국가 지원금도 끊겨 교사들의 자비로 운영하고 있지만 여전히 소외된 이들의 배움터라는 데는 변함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정보제공]

  • •  이선권(남, 1971년생, 구로구 구로동 섬돌야학 대표)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4.10.30 참고문헌 일부 수정 '심상섭 의원(http://blog.daum.net/simsangjung/11158048)'을 '심상정 의원(http://blog.daum.net/simsangjung/11158048)'으로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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