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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0A030102
지역 서울특별시 구로구 구로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윤정

“이게 지금 구로동성당이 생기기 전 모습이에요. 허허벌판이나 다름없죠?” 최상남[1949년생] 씨가 50여 년 전 빛바랜 사진을 보여 준다. 구로동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해 2010년 초 은퇴하기까지 40여 년을 구로동에서 지낸 최상남 씨와의 인터뷰는 이렇게 첫 장이 열렸다.

[변화가 태동하던 시기, 구로에 자리 잡다]

최상남 씨는 1968년 대학교를 진학하던 무렵 고향인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당시에는 국제산업박람회가 열리는 등 구로동 지역에서 산업화의 물결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당시에 구로에 와 보니 제1수출산업단지는 정리가 거의 돼 있는 상태였어요. 그 옆은 모두 갈대밭에 논밭이었고요. 그런 곳에서 박람회가 열린 거죠.”라고 최상남 씨는 회상한다. “제1수출산업공단에는 제조 공장이 들어서고, 가리봉5거리부터는 제2공단, 또 철길 넘어서면 수출의 다리라고 해서 3공단이 시작됐어요.”

최상남 씨는 지금의 한국산업기술시험원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고, 2010년 은퇴하기 전 『한국산업기술시험원 40년사』도 편찬했다.

“저는 구로에서 40여 년을 살았을 뿐 아니라 직장도 내내 구로에 있었어요. 그래서 이곳의 변화를 계속 보고 살았죠.”

최상남 씨는 40여 년 전의 구로동에 대해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있었다. “1970년대 구로3동 일대는 전부 흙이 빨간색이었어요. 황토흙이라고 부르죠. 지금의 구로공단우체국 자리는 묘지가 많았는데 당시 공사 현장도 자주 갔었거든요. 그때 묘지를 파면 연기가 나오고 미라도 많이 나왔어요. 여기 흙이 좋아 명당이라고들 했죠.”

[구로성당 30년사를 제작하다]

최상남 씨는 1993년에 『구로동 복음화 30년』도 편찬했다.

“자료를 모으고 역사의 한 부분을 남기는 것을 좋아해서인지 이런 일들을 주로 맡았네요.”라는 최상남 씨는 “구로동성당은 옛날에 공소였어요. 구로1~6교구부터 철산동까지 구로교구였죠. 그때는 도림동성당에서 신부님이 오셔서 미사를 보셨어요.”라고 말한다.

1963년 10월 17일 구로동공소는 구로동성당으로 승격됐다.

최상남 씨는 “구로공단이 있던 시절에는 공장 노동자들이 성당으로 참 많이 왔어요. 남자 성도보다도 여자 성도가 월등히 많았죠. 어떤 해에는 만 명이 넘게 세례를 받기도 했지요. 지금 성도가 6000여 명인 걸 감안하면 굉장히 많았던 거예요.”라고 말한다.

성당 활동을 열심히 하던 최상남 씨는 1987년부터 2년간 성당에서 운영하는 야학, 곧 보스꼬근로청소년학교 교감으로 재직하기도 했다.

최씨는 “당시 학생들의 연령대 차이가 컸어요. 청소년부터 아주머니까지. 또 남녀 혼성 반은 관리가 잘 안 돼서 애를 먹기도 하고요.”라며 에피소드를 하나둘 꺼낸다. “학생들 웅변대회도 직접 지도하고 또 대회가 있으면 같이 가기도 하고요. 혼자 자취하는 청소년 근로자들이 수업에 안 나오면 집에 찾아가기도 했어요. 그러면 아파서 밥도 못 먹고 혼자 앓고 있는 거예요. 교사들이 찾아가서 밥도 해 주고 그랬죠.”라며 옛날을 회상한다.

“지금은 그때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죠? 정말 많이 변했어요. 저도 여기서 자리 잡고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이제 손자도 있는 걸요.” 최상남 씨는 현재 그동안의 자료를 한데 모아 역사의 한 조각을 채우는 데 힘을 보태기 위해 구로동성당 50년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정보제공]

  • •  최상남(남, 1949년생, 구로구 구로3동 주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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