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0B010101
지역 서울특별시 구로구 가리봉동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다일

[옛 기록 속 가리봉동]

1789년(정조 13)인 기유년(己酉年)에 전국적으로 일제히 실시됐던 호구 조사 결과를 기록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따르면, 지금의 구로구 인근 지역인 금천현은 6개 면 41개 리로 되어 있다. 그 가운데 동면(東面)에는 독산리·가리산리·문교리·난곡리·장내리·신림리·봉천리·상도리·성도화리·서원리가 속해 있었으며, 호수는 332호, 인구는 1268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가리산리가 지금의 가리봉동이다.

1795년(정조 20) 금천현시흥현으로 바뀌면서 가리산리는 시흥현 동면에 소속되었다.

그리고 1895년(고종 32) 시흥현인천부에 소속된 시흥군으로 바뀌면서 시흥군 동면의 가리봉리로 바뀌었다.

다음 해인 1896년(정조 21) 8월 4일 인천부가 폐지되고 칙령 제36호에 따라 13도제가 시행되면서 시흥군은 경기도에 속하게 되었는데, 이즈음 가리산리에서 가리봉리로 이름이 바뀐 듯하다.

1912년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 가리봉리로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가리봉리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2호에 의해 시흥군이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가리봉동과 독산동 일부를 합쳐 가리봉동의 ‘가’와 독산동의 ‘산’자를 따서 가산동이라고 했다.

1975년 10월 1일 대통령령 제7816호에 의해 가산동은 다시 가리봉동과 독산동으로 분리되었는데, 당시 가리봉동은 인구 3만 3045명이 사는 지역이었다.

가리봉동은 1980년 7월 1일 서울특별시 조례 1413호에 의해 가리봉1동이 가리봉1동과 3동으로 분리되어 3개의 동으로 이뤄졌다.

1995년 3월 1일에는 금천구가 신설되면서 구로구에서 가리봉동의 일부가 금천구로 나누어졌다.

이때 가리봉1동의 일부와 가리봉2동의 대부분이 금천구로 편입됐고, 가리봉3동은 온전히 금천구의 소속으로 편입되었다. 금천구와 구로구 가리봉동의 경계는 남부순환도로를 기준으로 나뉜 것이다. 현재의 가리봉동은 약 0.43㎢로 동서로 넓게 뻗은 모양을 하고 있다.

[‘가리봉’ 지명에 얽힌 이야기]

1991년 한글학회가 편찬한 『한국땅이름큰사전』에 따르면 ‘가리봉’이란 지명은 경기도 광주시, 전라남도 함평군, 강원도 원주시와 인제군에서도 나타난다. ‘가리봉’이란 주위의 작은 봉우리가 이어져 마을이 된 데서 유래했다는 설과, 고을[谷]과 같은 의미인 ‘갈’ 또는 ‘가리’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또 ‘가리’는 갈라졌다는 뜻인데, 구로구의 전체 지형이 바짓가랑이처럼 갈라진 것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도 여겨진다.

『한국땅이름큰사전』에 따르면 옛날에는 가리봉1리를 ‘택하’, ‘무아래’, ‘모아래’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뒷산이 청룡혈이어서, 청룡이 물을 먹기 위한 큰 저수지가 있어서 저수지의 아랫마을, 곧 택하라 했는데,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저수지는 없어지고 논이 됐다고 전한다.

[정보제공]

  • •  윤묘병(여, 1927년생, 구로구 가리봉동 주민)
  • •  박명재(남, 1932년생, 구로구 가리봉동 주민)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