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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로의 주막에서 연립 주택 단지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0C020301
지역 서울특별시 구로구 수궁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윤정

“개화기 때 경인로는 이렇게 포장된 길이 아니고 흙길이었어. 기찻길 말고 인천에서 서울 가는 유일한 육로였지” 권이홍[1931년생] 씨에게 ‘주막거리’에 대해 묻자 경인로에 대한 이야기보따리를 먼저 풀어 놓는다.

수궁동 마을 입구 부근에 형성됐던 주막거리는 서울 영등포구청에서 오류동으로 자동차 도로가 나기 전인 1966년까지 인천에서 서울로 오가는 이들이 쉬어 가던 길목이었다.

[서울과 인천 사이, 사람과 화물의 집산지 역할을 하다]

오류골 주막거리는 지금의 오류동 120번지를 일컫는 마을 이름이자 거리 이름이었다.

오류골이란 옛날 이 지역에 오동나무와 버드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오류동이란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1899년 제물포~노량진 간 경인철도가 개통되기 전까지 중국 사신이나 관원들은 인천과 서울 간 약 100리길을 경인로를 따라 이동해야 했다.

이 때문에 오류골 경인로 변에는 여행객이나 관원들이 쉬어 갈 수 있는 ‘오류원’이 있었다. 대청과 객사를 갖춘 숙박 시설이었다.

1883년 인천이 무역항으로 외국에 개방되자 경인로의 중요성은 급격히 증대됐다. 경인로 중간 지점에 위치한 오류골은 사람과 화물의 집산지 역할을 했다. 자연스레 오류골 주변에는 주막거리가 형성됐다.

이곳에서 노자를 많이 썼을 경우 “오류주모에게 간 씹혔구나.”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고, 여자가 넉살이 좋으면 “오류동 주모냐?”고 빗대기도 했다는 말이 떠돌았다.

[기록 속에 남아 있는 오류골 주막거리]

오류골 주막거리는 역사 기록이나 소설 속에도 종종 등장한다.

개화기 외국인이 쓴 여행기에는 “인천에서 서울로 4인교[4사람이 메는 가마]를 타고 아침 일찍 출발하면 점심 때 오류골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경인로의 폭은 1~2m에 불과해 수레를 타지 못하고 걷거나 말이나 가마 등을 이용해야 했다.

흥선대원군오류골 주막거리에서 쉬어 갔다고 전한다. 1882년 임오군란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청나라 군대에 체포된 흥선대원군은 중국 천진(天津)의 보정부(保定府)에 연금되었다가 1885년 중국에서 풀려나 인천을 통해 귀국하던 길에 오류골 주막거리 객사에서 잠시 여장을 풀었다고 전한다.

이광수의 소설 『흙』에는 ‘오류장’이 등장한다. 오류장오류역 남쪽 개웅산 기슭의 군부대 안에 일본인이 지은 요정과 여관 시설이었다. 온천수보다 조금 낮은 온도의 미온수가 나오던 오류장은 조선총독부 고관들이 연회를 열던 곳이기도 하다.

[확장된 경인로, 사라진 주막거리]

이경노[1940년생] 씨는 “주막거리는 예전에 서울 들어가기 전에 묵어가던 데예요. 6·25 전까지만 해도 거기에는 재력 있는 사람이 드나들던 주점이 있었죠.”라고 말한다.

권창호[1950년생] 씨는 “오류골 주막거리오류동 중심부가 아니라 수궁동 입구 쪽, 그러니까 지금의 동부제강 자리를 뜻해요. 주점, 음식점, 이발소 등 여러 상점이 있었죠. 제가 중학교 때 경인로 확장하면서 다 없어졌어요.”라고 기억을 더듬었다.

1998년까지 동부제강과 사원연수원 사이에는 오류원의 객사로 쓰던 한옥이 남아 있었다. 행랑채 등 부속 건물은 사라지고 안채만 남았던 기와집은 팔각지붕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구조였다. 1930년대까지는 동양척식회사 관계자였던 고미네[高峰]라는 일본 사람이 살았고, 광복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는 조준기 씨가 살았다. 지금은 한옥이 철거되고 주변에 빌딩과 연립 주택 단지가 들어서 있다.

현재 주막거리 터에는 초가집 한 칸을 지어 옛 주막집을 재현해 놓았다. 초가집 양 옆 도로로 쉴 새 없이 내달리는 차량의 흐름이 세월의 변화를 실감케 한다.

[정보제공]

  • •  권이홍(남, 1931년생, 구로구 수궁동 주민)
  • •  이경노(남, 1940년생, 구로구 수궁동 주민)
  • •  권창호(남, 1950년생, 구로구 수궁동 주민, 수궁동 주민자치위원장)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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