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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채 한옥이 오롯이 남은 온수골 이야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0C020303
지역 서울특별시 구로구 수궁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윤정

“한옥이 드문드문 있었지. 지금 우리 집 같은 한옥이 산 아래 길 따라 있었어.” 90여 년을 궁동에서 산 이혁진[1906년생] 씨는 1949년 지은 한옥을 지금까지 관리 보존하고 있다. 주민 대부분이 옛 집을 헐고 새로 집을 지을 때 오래된 한옥을 헐지 않은 대신 바로 옆에 새 집을 지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혁진 씨 집은 궁동의 옛 주거상을 조금이나마 들여다 볼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온수동의 옛 모습, 마차길이 있는 온수골]

1400년대부터 수궁동에서 집성촌을 형성한 가문들은 각기 ‘양지말’, ‘음지말’, ‘온수골’, ‘터골’ 등의 뜸에서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기와집과 초가집을 짓고 옹기종기 모여 살았을 옛 모습을 담은 사진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옛 마을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곳이 아직 존재한다. 온수골길 60-6번지 일대 ‘온수골’이라 불리던 곳에 10여 채의 한옥이 오롯이 남아 있는 것이다.

온수골은 현재 온수도시자연공원 부지에 묶여 건물을 헐고 다시 짓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온수골 골목은 차가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좁아서 포장도 돼 있지 않으나 몇몇 집은 한옥을 개보수해 아직도 살림집으로 사용하고 있다.

온수골 골목을 따라 올라가면 널찍한 흙길이 나온다.

비포장도로인데도 넓게 나 있는 이유가 궁금했는데, 고상빈[1952년생] 씨가 “옛날 마차가 다니던 이 길을 마차길이라고 불렀다.”고 일러 주었다. 마차길 위쪽 집은 진주유씨, 아래 집은 제주고씨가 살았다고 한다.

[‘ㅁ’자 형태의 고택 들여다보기]

먼저 제주고씨 고택부터 살펴보자. 제주고씨 고택은 조선 시대 경기도에서 주로 볼 수 있는 ‘ㅁ자’형 구조의 집이다. 대문 옆에 행랑채와 사랑채가 있고, 대문과 마주 보는 곳에 대청과 안방이 있다. 집 내부는 더 세심하게 신경 쓴 흔적이 보인다. 서까래 아래 고미[굵은 나무를 가로지르고 그 위에 산자를 엮어 진흙을 두껍게 바른 지붕 밑]와 보꾹[지붕 안쪽의 겉면, 곧 지붕 밑과 천장 사이의 빈 공간에서 바라본 천장] 사이 빈 곳을 다락으로 사용하고 안방과 대청 사이에는 작은 문이 나 있다. 부엌과 안방 사이에도 상을 올릴 수 있도록 작은 문이 나 있는 등 집 안 곳곳에서 조선 시대 양반들의 주거 형태를 엿볼 수 있다.

고상빈 씨는 “1730년대 제주고씨가 온수골에 자리 잡을 때 지은 집입니다. 종손이 대대로 살았어요. 제가 어렸을 때에는 여기서 문중 제사를 드리곤 했죠.”라고 설명한다. 제주고씨 선산은 서울온수일반산업단지[일명 온수공단] 자리에 위치해 있었으나 공단이 들어서는 바람에 선산을 인천시 남동구 서창동으로 이전했다. 그 뒤로 집성촌의 성격이 약해지면서 제주고씨는 현재 여섯 가구만 온수동에 살고 있다.

진주유씨 고택은 온수골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오류동에 정착한 진주유씨의 사패지가 온수골 바로 아래까지 뻗어 있어서인지 집의 규모도 온수골에서 가장 크다.

전체적으로는 ‘ㅁ자’ 형태를 띠고 있는데, 사랑채와 안채가 행랑채와는 별도로 분리된 것이 특징이다. 규모면으로 볼 때 서울 북촌에 있는 큰 기와집과 견줄 만하다. 집 안쪽의 안채의 내부는 입식으로 개조해 꽤 최근까지도 살림을 살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행랑채에만 방이 다섯 개가 넘어 옛 진주유씨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현재 진주유씨 가문은 온수동을 모두 떠난 상태다.

[정보제공]

  • •  고상빈(남, 1962년생, 구로구 수궁동 주민, 온수동 새마을금고 이사장)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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