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6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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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黃載顯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주산면 창암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정을경 |
출생 시기/일시 | 1848년 - 황재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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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81년 - 황재현, 구한말 위정척사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895년 - 황재현, 홍주의병 활동 |
몰년 시기/일시 | 1903년 - 황재현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9년 - 황재현 건국포장 추서 |
출생지 | 충청남도 보령군 주산면 창암리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홍주의병 참가 |
[정의]
구한말에 활동하였던 충청남도 보령 출신의 의병.
[개설]
황재현(黃載顯)[1848~1903]은 충청남도 보령시 주산면 창암리 출신으로 구한말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정의를 지키고 사악함을 물리친다는 뜻으로, 가톨릭과 서양의 문물을 반대한 19세기 중엽 구한말의 사상 조류]을 펼친 인물이다.
[활동 사항]
황재현은 1878년 무과에 합격하여 선전관에 올랐으며, 1881년 이만손(李晩孫)[1811~1891] 등의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에 이어 충청도 대표로 홍시중(洪時中)[?~?]과 함께 척사소(斥邪 疏)를 올렸다. 황재현이 올린 상소에는 『조선책략(朝鮮策略)』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다른 상소자들과 함께 전라도 지도(智島)로 유배되었다.
1895년에는 귀양에서 풀려 홍주의병에 참여하였다. 김복한(金福漢)[1860~1924]과 안병찬(安炳瓚)[1854~1929] 등은 을미사변과 단발령 공포에 항의하며 의병을 봉기하고 홍주관아를 접수하였다. 그러나 홍주관찰사 이승우(李勝宇)[1841~1914]가 변심하고 의병들을 체포 구금함에 따라 의병 봉기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체포를 면한 이세영(李世永)[1869~1938] 등은 남포 일대에서 의병을 재기하였는데, 황재현은 이때 이관(李寬), 김홍제(金弘濟) 등과 함께 의병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위정척사파로써의 활동]
황재현은 조선의 문호를 여는 것에 있어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였기에, 1881년 김홍집(金弘集)[1842~1896]이 일본에서 들여온 『조선책략(朝鮮策略)』을 불태울 것을 주장하였다. 『조선책략(朝鮮策略)』에는 조선이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서는 청과 일본, 미국과 협력해 러시아를 견제하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저술되어 있다. 황재현이 올린 척사소(斥邪疏)에서 중요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오늘날 세상의 대세를 논한다면 중국이 천하를 호령하지 못하는 반면에, 바다를 사이에 두고는 러시아, 프랑스, 미국, 영국 등과 같은 나라의 세력이 크게 자라나 무도한 짓을 제멋대로 하고, 때때로 전쟁을 일으켜 중국과 겨루고 있으니 혹시라도 그런 세력들이 우리나라와 같은 작은 나라를 침범한다면 그 걱정은 마치 태산으로 계란을 내리 누르는 형세와 같을 것입니다. 또 이와 비슷한 소식으로는 황준헌의 조선책략이 있고 명백한 사실로서는 일본 사신의 행동이 있었으니 참으로 나라가 존재하느냐 망하느냐 하는 위급한 때입니다. [중략] 안으로는 훌륭한 장수가 없고, 밖으로는 적의 나라가 많으며 창고는 텅 비고, 무기와 군사는 정예롭지 못하므로 계책을 쓸 수 없고, 형편을 어찌할 수 없기 때문에 그제서야 비상한 계책을 내어 또 세상에 없던 일을 경영하여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사신의 행장을 번거롭게 꾸리니, 그 의도는 바로 이웃나라와 연계를 맺어서 외적을 막고 통상하여 피차 적용하자는 데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니 잘하면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군사를 강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으나 잘하지 못하면 도리어 도적을 불러오고 화를 초해하기 쉽습니다. [하략]”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