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07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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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演 |
영어공식명칭 | Shin Yeon |
이칭/별칭 | 충호(仲浩),우헌(寓軒)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홍수 |
출생 시기/일시 | 1534년 - 신연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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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594년 - 신연 사망 |
묘소|단소 | 두음현 -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문거리 |
성격 | 효자 |
성별 | 남 |
본관 | 영해 |
[정의]
조선 전기 청송 출신의 효자.
[가계]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충호(仲浩), 호는 우헌(寓軒). 아버지는 호군(護軍)을 지낸 신종위(申終渭), 어머니는 박기(朴琦)의 딸 숙부인(淑夫人) 밀양박씨(密陽朴氏), 할아버지는 부사과(副司果)를 지낸 신권(申眷), 증조할아버지는 벽동군수(碧潼郡守)를 지낸 신명창(申命昌), 부인은 생원(生員) 이훈(李薰)의 딸 숙부인 선성이씨(宣城李氏)이다.
[활동 사항]
신연(申演)[1534~1594]은 청송도호부(靑松都護府)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을 뿐만 아니라, 마음이 순박하고 곧아서 불의를 보면 용납하지 않았다. 일찍이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공부할 때,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 유림(儒林)의 추앙과 신임을 받았다. 신연이 무관(武官)인 습독관(習讀官)으로 있을 때, 당시 집정관(執政官) 이명(李蓂)[1496~1572]과 민기(閔箕)[1504~1568], 성세장(成世章)[1506~1583] 등이 신연에게 직책을 주려고 하였으나, 공명(功名)을 좇는 것을 뜬구름으로 보고 향리로 낙향하였다. 이후 신연은 고향에서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였다.
어머니의 죽음을 당해서는 애통의 극함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자기의 목숨을 끊으려 하였으나, 아버지가 살아 계셔서 그렇게 못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삼 년 동안 한결같이 하루에 세 번씩 묘소를 참배하였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이나, 습종(濕腫)으로 다리가 팽팽하게 부어서 걸음이 불편할 때에도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여 성묘를 하였으니, 마을 사람들 가운데 신연의 효행에 감탄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각지의 피난민들이 청송으로 몰려들었다. 『정감록(鄭鑑錄)』이라는 예언서에 청송이 피난지라고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마을은 피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굶주린 이들이 떼를 지어 구걸하는 지경에 이르자, 마을 사람들은 감당할 수가 없어서 모두가 대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그들의 숙식을 거절하였다. 인자한 성품의 신연은 피난민들이 당장 굶어 죽게 생겼는데, 혼자만 먹고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집안 재산을 털어 양식을 구해, 동네 어귀에 큰 가마솥을 걸어 놓고, 죽을 쑤어 진휼에 힘썼다. 그 결과 수많은 피난민들이 목숨을 건졌고, 신연은 넉넉지 못한 가산을 탕진하였다.
[묘소]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문거리[옛 두음현(斗音峴)]에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1563~1633]가 신연의 의로운 행실을 선조에게 아룀으로써 사후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추증되었다. 또한 신연의 손자 하음(河陰) 신즙(申楫)[1580~1639]이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오르게 되니, 주위 사람들은 모두 할아버지 신연의 음덕이라고 칭송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