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07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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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林得仁 |
영어공식명칭 | Im Deugin |
이칭/별칭 | 인지(仁之)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홍수 |
출생 시기/일시 | 1674년 - 임득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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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727년 - 임득인 사망 |
거주|이주지 | 경상도 청송도호부 - 경상북도 청송군 |
묘소|단소 | 생초 -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두현리 |
성격 | 효자 |
성별 | 남 |
본관 | 예천 |
[정의]
조선 후기 청송 출신의 효자.
[가계]
본관은 예천(禮泉). 자는 인지(仁之). 양양군(襄陽君) 임자번(林子蕃)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임일봉(林日奉), 어머니는 청주한씨(淸州韓氏), 할아버지는 임막소(林鏌韶), 증조할아버지는 무과(武科) 출신의 임우영(林宇榮)이며, 부인은 김해김씨(金海金氏)이다. 큰아들은 임해봉(林海鳳)[1695~1755], 큰손자이자 임해봉의 장남 임세걸(林世杰)[1713~1768]과 임해봉의 둘째 아들은 임기명(林基命)[1724~1781] 그리고 임기명의 아들 임성엽(林誠曄)[1757~1798] 모두 효자로서 명성이 있었다.
[활동 사항]
임득인(林得仁)[1674~1727]은 타고난 성품이 효성스러워 부모를 섬김이 비할 데 없이 극진하였다. 일찍이 아버지가 병으로 위독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별별 약을 써 보았지만 효과가 없자 종당에는 자기 자신의 손가락 끝을 잘라 그 피를 드시게 하여 몇 달간 연명케 하였다. 부친을 장사 지낸 뒤에는 삼 년 동안 매일 산소를 찾아가 성묘하였다.
한편, 임득인의 효성은 4대에 걸쳐 계승되었다. 임득인의 큰아들 임해봉도 부친의 효행에 감동을 받아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정성스레 모셨다. 임득인이 오랜 병환 끝에 백방으로 약을 써도 무효하고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자 임해봉도 아버지가 할아버지에게 그랬듯이 자신의 손가락 끝을 잘라 수혈하여 삼 일 동안 연명케 하였다.
임해봉의 아들 임세걸과 임기명도 익히 보아 온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품행을 본받았다. 두 형제는 아버지의 병세가 위독해지자 그들 자신의 손가락 끝을 잘라 그 피를 드시게 함으로써 수년 동안 연명케 하였다. 부친상을 치른 후 두 형제는 더우나 추우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날마다 성묘를 하였다. 임세걸과 임기명이 홀로 된 구십 노모를 힘과 정성을 다하여 봉양하니, 단 한 번도 크게 꾸짖는 소리가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두 형제는 노모가 돌아가시자 장사를 치르기 전에는 움막을 짓고 거처하였으며, 장례를 치른 후에는 매일같이 성묘를 하였는데, 새벽에 가서 밤에 돌아오는 성묘길에는 호랑이가 따라다니며 곁에서 보호해 주었다고 한다.
임기명의 아들 임성엽도 아버지의 품행을 본받아 어버이를 극진히 섬겼다. 아버지가 병들어 앓고 누웠을 때 폭우로 강물이 불어나서 시장을 보러 갈 수 없게 되자 맛좋은 음식을 공양할 수 없는 일로 몹시 걱정을 하였다. 그러던 중에 들꿩 한 마리가 홀연히 마당으로 날아들었다. 임성엽은 기뻐하며 들꿩을 잡아 봉양하였다. 사람들은 이 일을 두고 임성엽의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켰기 때문이라고 칭송하였다. 아버지가 병으로 위독하여 사경에 이르자 임성엽은 자신의 손가락 끝을 잘라 그 피를 드시게 하였으며, 거상(居喪)에는 한결같이 가례(家禮)의 예법을 그대로 좇아서 행하였다. 임성엽은 평소 학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의기(義氣)를 숭상하여 흉년이 들면 곤궁한 사람을 진휼하는 데 재물을 아끼지 않았다.
[묘소]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두현리 생초(生草)에 임득인의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임득인을 비롯해 임해봉, 임세걸, 임기명, 임성엽은 5대에 걸쳐 배출된 다섯 효자로 읍보(邑報)에 여러 차례 등재되며,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