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0804 |
---|---|
한자 | 徐高洛 |
영어공식명칭 | Seo Gorak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권영배 |
출생 시기/일시 | 1867년 - 서고락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906년 - 서고락 신돌석의진에 입진 |
몰년 시기/일시 | 1909년 08월 11일 - 서고락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6년 - 서고락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출생지 | 경상도 청송도호부 남면 마평 - 경상북도 청송군 주왕산면 상평리 |
거주|이주지 | 경상도 청송도호부 남면 마평 - 경상북도 청송군 주왕산면 상평리 |
활동지 | 경상북도 청송군 |
활동지 | 경상북도 영덕군 |
활동지 | 경상북도 영양군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정의]
개항기 청송 출신의 의병.
[개설]
서고락(徐高洛)[1867~1909]은 신돌석(申乭石)의진(義陣)에 입진하여 활동하다가 1909년 8월 11일 진보군 동면 백자동(柏子洞)에서 체포되었다. 영덕경찰서로 압송되던 중, 영덕군 동면 주동(酒洞) 산간에서 도주를 시도하다 호송하던 경찰의 총격을 받고 순국하였다.
[활동 사항]
서고락은 경상도 청송도호부 남면 마평(馬坪)[지금의 경상북도 청송군 주왕산면 상평리] 출신이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乙巳條約)이 강제 체결되자 이에 대한 반발로 전국에서 항일의병이 일어났다. 이때 서고락은 경상북도 영덕에서 신돌석이 대규모 부대의 의병을 일으켜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영양·청송·울진 등 각지에서 항일투쟁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달려가 이에 투신하였다.
신돌석의진은 1906년 3월 창의(倡義) 직후부터 일본의 한국 침략 전초기지인 울진에 이어 장호관(藏湖館) 등을 수차 공격하였다. 이리하여 각지의 관아(官衙)를 장악하고 무기와 군수를 확보하는 등 경상북도 북부 지역과 강원도 남부 지역을 오르내리며 활동하였다. 서고락도 이 무렵에 입진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서고락은 1908년 12월 12일 신돌석 의병장이 영덕군 지품면 눌곡(訥谷)에서 피살당한 뒤에도 뜻있는 동지들과 함께 영양·청송·영덕 등지에서 활동을 계속하였다.
서고락은 항쟁을 하다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경상북도 진보군 동면 백자동 산간에 잠시 머무르던 중 일본 순사들의 급습을 받았다. 피할 겨를도 없이 백자동 출신 김종달(金鍾達)과 청송 진보 출신 이수목(李守睦) 등과 함께 잡혔다. 서고락은 이들과 같이 영덕경찰서로 압송되던 중, 영덕군 동면 주동의 산길에서 황급히 달아나며 탈주를 시도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 순사들의 총격을 받아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이때가 1909년 8월 11일이었다.
[상훈과 추모]
2006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