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1500
한자 靑雲-靑松地域-生活文化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창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청운마을 - 경상북도 청송군 청송읍 청운리 지도보기

[개설]

경상북도 청송군 청송읍 청운리는 16세기 청송 평해황씨(平海黃氏) 입향조가 마을을 개척한 이래,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중반 청송군에서 가장 큰 규모의 동성촌락(同姓村落)이었으며, 현재까지도 큰 규모의 혼거(混居) 동성촌락으로서 성격을 유지하고 있는 마을이다. 또한 청운마을은 조선시대 교통의 요충지로서 청운역(靑雲驛)이 있었던 곳이자, 오늘날 주왕산국립공원의 길목에 위치한 큰 마을로서 전통사회의 생활문화를 바탕으로 근대화와 산업화의 영향을 비교적 적극 수용하였다.

청운마을에서는 의식주와 세시풍속을 비롯한 전통사회 반촌(班村)과 민촌(民村)의 생활문화가 현대의 생활문화와 함께 어우러져 다양한 방식으로 전승되고 있다. 전통과 현대적 삶의 모습이 어우러진 청운마을의 생활문화를 통해 청송 지역의 생활문화를 살펴볼 수 있다.

[청운마을의 의생활]

전통사회에서 직물(織物)을 만드는 길쌈은 매우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노동이었다. 청송읍 청운리는 지리적으로 용전천(龍纏川)을 끼고 있기 때문에, 삼을 재배하여 베를 짜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많은 양의 물을 충당하기에 유리하였다. 이렇게 생산된 삼은 청운리 사람들에게 자급자족은 물론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현재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길쌈은 거의 행해지지 않는다.

전통사회의 일상복이었던 한복은 성별과 나이에 따라 그 구성을 달리하였다. 남성의 저고리와 바지, 여성의 저고리와 치마, 갓난아이에게 입히는 배냇저고리 등이 성별과 연령에 따라 구분할 수 있는 대표적인 옷이었다. 전통의상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기 시작하였는데, 1920년대 이후 청운리 마을사람들의 복식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예전처럼 복잡하게 갖춰 입던 속옷은 앞뒤가 터진 고쟁이와 밑이 막힌 단속곳으로 단순화되었다. 또한 전통적으로 바지와 치마로 구분된 하의는 남녀 모두 반바지 형태의 바지로 교체되었다. 일제가 정책적으로 강요하였던 일본식 일바지인 ‘몸뻬바지’도 일상화되었다. 이 일바지를 입지 않으면 배급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들은 점차 활동이 편리한 일본식 일바지에 익숙해져서 일바지는 일상복이 되었다. 산업화가 진전되기 시작한 1960년대 이후에는 서양식 기성복의 보급이 빠르게 전개되면서 일상복으로 대체되었다. 이후 한복은 일상복이 아닌 전통적인 행사나 의례에 착용하는 의례용 복식이 되었다.

전통 시대 청운마을 여성들은 열 살이 되기 이전인 어린아이 시절부터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바느질을 배웠다. 처음 바느질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들에게 저고리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 저고리는 남녀 모두 입는 것이고, 다른 웃옷과 구조가 비슷하기 때문에, 저고리 만드는 법을 가르치면 다른 웃옷을 만드는 법도 쉽게 익힐 수 있었다. 한편, 바느질을 할 때 중요시되었던 것은 마름질이었다. 마름질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세탁 후에 옷이 늘어지고 뒤틀렸기 때문이다. 바느질 방법은 기교보다 실용성을 중요시하였기 때문에 ‘감침질[감채기]’, ‘홈질[호프기]’, ‘박음질[밲음질]’ 등의 몇 가지 방식만 사용하였다.

세탁 또한 의생활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청운마을에서는 세탁할 때 잿물을 사용하였는데, 잿물 중에서도 메밀껍질로 만든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겹옷이나 솜옷은 옷을 분리하여 세탁하였고, 무명이나 삼베는 삶아서 세탁하였다. 옷에 때가 잘 타지 않도록 합성염료를 구입하거나 주변의 나뭇잎과 풀을 이용하여 옷감에 색을 입혔다. 청운마을에서 염색을 할 때에는 무쇠솥을 사용하였는데, 무쇠솥의 성분이 매염제(媒染劑)의 역할을 하여 색이 오랫동안 유지되도록 하였다.

혼례(婚禮)나 상장례(喪葬禮) 등의 의례에서 착용하였던 의복은 일상복과 그 성격을 달리하였다. 청운마을에서 전통 혼례를 치를 때, 신랑은 명주바지와 저고리에 두루마기를 입고 사모관대(紗帽冠帶)를 하였다. 신부는 머리에는 비녀를 꽂고 족두리나 화관(花冠)을 썼다. 겉에는 분홍치마에 녹색 또는 노란색 저고리를 입고 흰 고무신을 신었다. 속옷으로는 속적삼, 속바지, 고쟁이를 입었다. 혼례복에 금박이나 은박을 넣거나 자수(刺繡)로 문양을 넣지는 않았다. 신부의 예복은 족두리나 화관을 제외하고 친정에서 마련하기 때문에 다소의 차이를 보였지만, 신랑의 예복은 마을에 있는 것을 공통으로 쓰기 때문에 동일한 것이었다.

[청운마을의 식생활]

청운리의 일상 음식과 의례 음식을 중심으로 청송 지역의 식생활을 살펴볼 수 있다. 전통사회의 주요 산업이었던 농업의 현대화가 이루어지기 이전 청운리의 식생활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풍족한 편은 아니었다. 마을 아낙들은 밥을 지을 때 보리쌀을 솥바닥에 넣은 뒤, 그 위에 백미로 웁쌀을 놓았으며, 감자도 같이 얹었다. 웁쌀 부분은 시어른에게, 나머지 보리쌀과 감자는 남편, 시어머니, 자식, 며느리순으로 나누었을 정도로 형편이 어려운 가정이 대부분이었다.

1950년대를 전후로 흉년이 들었을 때는 식량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다양한 재료를 구황식품(救荒食品)으로 이용하였다. 청운리에서는 쑥을 포함한 산나물과 기장쌀이나 좁쌀을 조금 넣어 죽을 쑤어 먹거나, 소나무 속껍데기로 떡을 빚은 송구떡[송기떡(松肌-)], 덜 여문 보리를 솥에 볶아 반죽한 떡보리, 콩기름 짠 찌꺼기를 누룩처럼 만든 대두박(大豆粕)[탈지대두(脫脂大豆)] 등의 구황식을 이용하였다. 1970년대에 통일벼가 보급된 이후로 밥상에 쌀밥이 오르기 시작하였고, 1980년대부터는 먹는 걱정을 하지 않을 정도로 쌀 생산량이 늘어났다.

청운마을의 의례 음식을 통해 청송 지역 의례음식의 특성을 잘 살필 수 있다. 청운마을에서 정월 차례를 지낼 때는 제사상에 메[밥] 대신 떡국을 올렸다. 모든 가정에서 차례에 떡국을 올리는 것은 아니었으나, 떡국을 올리지 않는 집에서도 따로 떡국을 장만하여 마을 어른들에게 대접하였다. 차례상에는 떡국 외에 탕, 나물, 곶감, 고기, 대추, 밤, 사과, 밀감 등을 올리며 “죽은 사람보다는 산 사람이 맛있고 편해야 한다.”라는 신념을 통해 형식보다는 실용을 추구하는 청운마을의 생활문화를 엿볼 수 있다.

청운마을에서 혼례 시 대례상(大禮床)을 차릴 때는 ‘음식을 올리기보다 의미를 올린다.’고 하여 특별히 공을 들여 준비하였다. 대례상 가운데 부분에 대추·밤·곶감·쌀을 올리고, 신부와 신랑 쪽에 각각 청홍보(靑紅褓)에 싼 암탉과 수탉을 놓는다. 대례상의 한편에는 청실과 홍실로 장식한 병에 대나무나 향나무를 꽂아 두었다. 신부 쪽에는 손을 씻고 닦을 수 있도록 물이 담긴 대야와 술주전자를 두고, 신랑 쪽에는 특별히 집에서 만든 두부와 젓가락을 놔둔다. 신랑은 젓가락을 사용해서 두부를 온전한 모양을 유지한 채로 한 번 뒤집어 놓아야 하는데, 이는 신랑의 재주와 성격을 파악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이때 두부 옆에 적당한 크기의 쇠젓가락 대신 팔뚝만 한 나무젓가락을 놓아 신랑을 골려 주기도 하였다.

청송 지역의 여러 마을에서 전승되고 있는 동제(洞祭)에 진설(陳設)하는 음식도 기제사(忌祭祀)의 경우와 유사하다. 동제에서 제의(祭儀)는 유교식로 전승되는 사례가 많은데, 일부 마을에서는 무속적 방식으로 지내고 있다. 이럴 경우 진설하는 제물에서 차이가 나는데, 무속적 방식의 제의에서는 고사의 경우처럼 돼지머리를 상에 올린다. 동제의 제물은 마을마다 유사하지만, 다소간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가령 청운마을에서는 동제를 지낼 때, 할아버지당과 할머니당에 진설하는 탕의 종류를 달리하고 있다. 할아버지당에는 일반적인 탕을 올리지만 할머니당에는 미역국을 올려, 삼신신앙(三神信仰)의 일면을 살필 수 있다.

[청운마을의 주생활]

농촌마을의 주거생활은 주변의 지형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청운마을의 경우 마을의 동쪽으로 용전천이 흐르고, 용전천 건너편에 직두들이라는 전답이 펼쳐져 있다. 마을의 서쪽에는 높이 435.1m의 보광산(普光山)에 직면하여 청운마을은 서고동저(西高東低)의 지형을 이루고 있다. 이런 지형적 요인으로 청운리의 가옥들은 서고동저의 경사면을 따라 이어지는데, 대체로 동쪽의 용전천 건너편의 안산(案山)인 성황산(星皇山)을 바라보는 동향(東向)으로 건립되었다. 이러한 주거 입지상의 특성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현대에 들어서 개축이나 신축하는 주택도 대부분 동향으로 짓고 있다.

청운마을에서 찾아볼 수 있는 전통주택의 양식으로는 지붕 용마루의 양쪽 합각(合閣)에 둥근 구멍을 낸 까치구멍집, ‘정(井)’ 자의 형태를 한 우물집, 베를 짤 때 사용하는 도투마리를 닮은 도투마리집, 그리고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자형 집 등이 있다. 그중에서 국가민속문화재 제172호인 청송 성천댁청운마을의 다른 가옥들과 달리 마을 서쪽 높은 곳에 있으면서 남쪽을 향해 대문을 세웠다. 이 건물의 정확한 건축연대는 알 수 없으나, ‘정(井)’ 자 형태의 우물집 배치방식을 취한 최소 규모의 건물로서 전통가옥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동성촌락으로서 성격을 유지하고 있는 만큼 마을 곳곳에는 평해황씨 가문에서 세운 정자, 서당 등을 볼 수 있다. 용전천 건너 성황산 중턱에 세워져 있는 만취정(晩翠亭)은 평해황씨 22세손인 만취동(晩翠洞) 황학(黃學)을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들이 1847년(헌종 13) 세운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의 팔작지붕의 한식 기와집이다. 또한 마을 초입 근처의 높은 지대에는 파서정(巴西亭)이 있다. 파서정은 무과 합격자인 황정필(黃廷必)을 기념하는 정자로 정면 4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청운마을 남쪽에 있는 영이정(詠而亭)은 평해황씨 입향조인 황덕필(黃德弼)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자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각지붕 건물이다. 영이정을 옮겨 지은 기록을 담은 이건기(移建記)를 보면, ‘1739년(영조 15) 마을 가운데 건립하였으나 1945년에 현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그 밖에 마을의 서쪽 끝에는 만취동 황학이 강학하던 자리에 세운 만취서당(晩翠書堂)이 있다. 만취서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의 팔작지붕의 한식 기와집이다. 황학의 후손 황대손(黃大孫)이 1830년(순조 30) 건립하였으며, 마을의 제일 위쪽에 있다. 만취서당을 기점으로 마을은 부챗살을 펴고 있다.

[청운마을의 세시풍속]

청운리의 세시풍속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선별적으로 행해진다. 설날과 추석은 국가 공휴일이자 민속 명절이기에 세시(歲時)가 행해지지만, 그 밖의 명절은 몇몇 가정이 간소하게나마 행사를 치르는 정도이다. 먼저 정월의 대표적인 세시는 세배와 차례로, 아침에 일어나 몸을 정결하게 한 뒤 설빔으로 갈아입고 집안 어른들께 세배를 드리고 차례를 지낸다. 과거에는 이웃들을 찾아다니며 세배를 드렸으나, 지금은 행하지 않는다. 그 외에도 과거에는 정초에 용물뜨기[정월 대보름 새벽에 우물물을 떠오는 것], 복조리, 수숫대와 황장(黃腸) 세우기 등의 세시풍속이 있었으나, 현재는 찾아보기 힘들다. 몇몇 가정의 경우 대보름을 전후하여 찰밥과 귀밝이술[耳明酒]을 먹곤 한다. 정월 대보름 자시(子時)에는 동제를 지내는데, 이장 주관하에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다.

2월에는 영등 할매가 내려온다는 날에 행하는 영등 할매 고사를 지냈다. 3월에는 화전놀이를 하며 동년배, 반별, 문중끼리 술을 마시고 풍물을 치며 하루를 놀며 즐겼으나, 최근에는 추수를 마친 뒤에 관광을 가는 것으로 바뀌었다. 4월 초파일[부처님오신날]에는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고 연등을 단다. 5월 단옷날에는 창포(菖蒲) 삶은 물에 머리를 감고 그네를 뛰며 성대하게 놀았다. 그네를 가장 잘 뛰는 사람에게는 공책 같은 상품을 주기도 하였으나, 현재는 전승되지 않는다. 6월에는 개를 잡아 복달음(伏-)을 하였는데, 최근에는 약수닭백숙을 먹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7월에는 풋구[호미씻이]가 있어 과거에는 주인집에서 머슴과 일꾼에게 음식을 마련해 줬으나, 현재는 머슴들이 사라져 더 이상 행하지 않는다. 8월에는 아침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한다. 과거에는 중구제사(重九祭祀)[중구차례(重九茶禮)]를 지냈으나 1970년대 이후 추석에 지내게 되었다. 9월과 10월은 수확기이기에 특별한 세시의례는 행해지지 않는다. 지금도 동지(冬至)에는 팥죽을 쑤어 먹으나, 문간에 뿌리는 일은 번거롭다 하여 행하지 않는다. 윤달[閏月]에는 공달이라 하여 탈이 없다 여겼으며 수의(壽衣)를 만들거나 집 수리, 이사, 이장(移葬) 등이 이루어진다.

[현황]

청운리는 2016년 농림축산식품부가 주관하는 ‘2017년 일반 농산어촌 개발 신규 공모사업’의 창조적 마을 만들기 ‘마을 단위’ 종합개발 유형으로 선정되었다. 청운리부남면 대전3리, 파천면 신기1리와 더불어 지역의 특색 있는 자원을 이용한 환경과 경관의 개선사업에 힘쓰고 있으며, 깨끗하고 살기 좋은 마을을 조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한 청운교 주변에 야영장을 조성하여 마을의 경관을 알리고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청운마을에서는 의식주와 세시풍속에서 간소한 형태로나마 전통을 잇고자 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인구의 과소화가 심한 농촌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는 모습도 살펴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청운마을의 전통적인 생활문화는 농촌 환경을 개선하여 새로운 삶을 지향하는 데 훌륭한 자원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의의를 가지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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