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15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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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周王山- |
분야 | 구비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원준 |
[개설]
조선의 시인과 묵객은 전국의 명산을 유람하며 지은 유산록(遊山錄)을 통해 절경을 노래하기도 하고 구절구절 이야기를 펼쳐 놓기도 했다. 『주왕산유산록』 또한 조선의 이름있는 유자(遊者)들이 주왕산 구석구석을 누비며 그 아름다운 절경을 묘사하고 그에 따른 감흥을 읊조렸다. 특히, 『주왕산유산록』에는 주왕산에 산재한 사찰, 암자, 봉우리, 누대, 굴, 폭포 등을 중심으로 유산 과정을 펼쳐 놓았기에 가보지 않고도 주왕산이 펼친 절경을 상상할 수 있다. 『주왕산유산록』에 펼쳐 놓은 이야기를 통해 옛 선비들의 주왕산 나들이의 묘미를 되짚어본다.
[주왕산의 유래 및 명칭]
주왕산은 청송군 주왕산면 일대에 자리 잡고 있다. 산명(山名)은 석병산(石屛山), 대둔산(大遯山), 주방산(周房山), 소금강산(小金剛山) 등 여러 가지 명칭이 있다. 암석이 병풍처럼 둘렀다 하여 석병(石屛)이라 불렀고, 신라 선덕여왕의 족자(族子)인 김주원(金周元)이 이 산에 와서 은거하였다고 해서 주방산 또는 대둔산이라고도 한다. 신라 말기에 당나라 사람 주도(周鍍)가 난을 일으킨 후 이 산에 피세하였다가 신라 장수 마일성에게 잡히는데, 그 후 나옹(懶翁)[1320~1376]이 이곳에서 수도할 때 이 산을 주왕산(周王山)이라 불러 지금까지 주왕산이라 칭한다. 또한 조선팔경(朝鮮八景) 제육위(第六位)에 있으므로 소금강산(小金剛山)이란 명칭도 있다.
[조선의 선비들, 주왕산을 유람하다]
옛 선비들은 세속의 찌든 때를 씻고 호연한 기상을 채우기 위해 팔도의 명산을 주유하기를 하나의 바람[望]으로 삼았다. 청송 치소(治所)의 동남쪽 30리[약 12㎞]쯤에 우뚝하게 높고 큰 산이 있어 ‘주왕산’이라 한다. 큰 바위 봉우리의 오묘하고 신비한 경치가 기이함을 자아내 근처의 명산이라 일컬어져 선비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장현광(張顯光)을 필두로 하여 많은 시인, 묵객들이 주왕산을 찾아 노닐며 그 아름다움을 글로 남겼으니 이른바 유산록(遊山錄), 유산기(遊山記)이다. 지금까지 국역된 주왕산 관련 유산록은 모두 35명 36편이 있다. 이 가운데 주왕산을 명기한 유산록은 28명 29편이며, 『동유록(東遊錄)』, 『옥계록(玉溪錄)』, 『남유록(南遊錄)』 등과 같이 주왕산이 명기되지는 않았지만 주왕산을 중심으로 지은 유산록이 7명 7편이 있다.
주왕산 유산록을 지은 저자들은 16세기부터 시작하여 20세기까지 줄곧 이어졌는데, 19세기에 지어진 유산록이 전체 비중의 절반을 차지한다. 특히, 박인조(朴麟祚)[1883~1952]는 『주왕산수록(周王山水錄)』에서 주왕산을 누비며 감탄하게 되는 절경을 시로 노래하였는데, 그 시수가 63수나 되어 따로 시집을 만들 정도의 분량을 남겼다.
이들 가운데 가장 짧은 거리를 유람한 인물은 이반(李槃)[1686~1718]으로 『유주왕산기(遊周王山記)』를 남겼다. 이반의 유산(遊山) 과정을 보면, 눈 쌓인 주왕산의 동쪽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 옛 성에 이른다. 다시 성문을 따라 ‘주왕암(周王庵)’을 돌아보고 ‘학소암(鶴巢庵)’ 주변의 절경을 노래한 후 폭포 아래 ‘용추(龍湫)’를 묘사하는 것으로 유산 과정을 맺고 있다.
한편, 가장 긴 유산 과정을 기록한 인물은 신집(申楫)[1580~1639]으로, 『유주방산록(遊周房山錄)』에 자신의 발길이 닿은 곳을 기록해 놓았다. 그의 유산 일정을 보면, ‘삼자현(三者峴) → 마평(馬坪) → 삼위촌(三圍村) → 수기암(竪旗巖) → 장군암(將軍巖) → 와룡암(臥龍巖) → 금오택(金鰲澤) → 자하성(紫霞城) → 폭포동(瀑布洞) → 비류봉(飛流峯) → 나왕굴(羅王窟) → 주방사(周房寺) → 옥제루(玉帝樓) → 옥순봉(玉笋峯) → 나왕전(羅王殿) → 망학대(望鶴臺) → 지장봉(智藏峯) → 격수암(激水巖) → 청학동(靑鶴洞) → 청학암(靑鶴庵) → 금탑봉(金塔峯) → 취선대(醉仙臺) → 학소(鶴巢) → 반암(攀巖) →용담(龍潭) → 광혈(廣穴) → 사이촌(四耳村)’까지 주왕산 곳곳을 빠지지 않고 누볐다.
[선비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선비들이 구석구석 누볐던 주왕산의 명소 가운데 특히 많은 발길이 닿았던 ‘사찰[寺], 암자[庵], 봉우리[峰], 암(巖), 누대(樓臺), 굴(窟), 폭포’ 등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유산록에 언급된 사찰로는 대전사(大典寺), 고운사(孤雲寺), 운수사(雲水寺), 청학사(靑鶴寺)가 있다. 주방사(周房寺), 주왕사(周王寺)가 나오나, 주방사는 대전사의 옛 이름이고, 주방과 주왕은 같이 쓰이는 명칭이므로 둘은 대전사를 다르게 부른 것이다. 고운사, 운수사, 청학사는 한두 사람의 유산록에 언급될 뿐이지만, 대전사는 거의 모든 유산자가 들렀던 곳이다. 대전사란 명칭은 당나라에서 도망 온 주도가 그의 아들 대전도군(大典道君)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고 한다. 『신동국여지승람』에는 주방사(周房寺)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 유정이 승군을 훈련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부속 암자로는 백련암[백운암], 주왕암이 있다.
옛 선비들은 산수를 찾아 그 아름다움을 완상하지만 이목의 즐거움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산의 중후함을 살펴서 나의 일정한 거동을 생각하고, 그 빼어난 것을 살펴서 나의 우뚝한 절개와 의리를 생각하며, 막힘없는 물의 흐름을 살펴서 그 그치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다. 선비들이 구름과 숲에 나아가는 것은 세속적 번뇌를 씻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고 합일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산수가 지닌 본연의 가르침을 통해 덕성을 기르기 위한 길이기도 하다.
[신집의 『유주방산록』]
1604년 4월 1일에 주왕산을 유람한 신집은 『유주방산록(遊周房山錄)』에서 대전사에 대해, “옥순봉 앞에 있다. 절은 무너진 지 이미 오래되었고, 동량과 서량도 이미 반 넘게 기울었다. 오직 불전과 상실(上室)만이 우뚝 홀로 남아 있었는데, 노승과 동자승 네댓 명이 살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음과 같은 오언율시 한 수를 지었다.
고사승거소(古寺僧居少)[오래된 절에는 거처 승 적은데]
산당객감다(山堂客感多)[산당에는 나그네의 감회 많네]
계제유조적(階除惟鳥跡)[섬돌에는 오직 새 발자국뿐]
정반자태화(庭畔自苔花)[뜰 가에는 이끼가 절로 가득하네]
축불향연동(祝佛香煙動)[부처님 축원하는 향 연기가 퍼지고]
담경촉영사(談經燭影斜)[불경 이야기에 촛불은 가물가물]
석인개이몰(昔人皆已沒)[옛사람은 모두가 이미 죽었으니]
수여문신라(誰與問新羅)[뉘에게 신라에 관해 물어보리]
[박인조의 『주왕산수록』]
『주왕산수록』에는 많은 암자가 나온다. 주왕암, 백련암(白蓮庵), 적조암, 청련암(靑蓮庵), 학소암 등 주왕산에 산재한 고적한 암자에 이끌려 선비들은 발걸음을 옮겼다. 이 가운데 주왕암은 대부분의 유산자가 한 번 이상 거쳐 갔던 곳이다. 주왕암은 자하성(紫霞城) 맞은편 계곡을 건너 약 1,000m 지점에 있다. 암자에 이르는 비탈진 길목에는 발자국 흔적이 뚜렷하게 보이는데, 이는 주도를 친 신라 장수 마일성 장군의 것이라 한다.
주왕암 다음으로 많이 찾은 암자는 백련암으로 백운암(白雲庵)이라고도 한다. 백련암은 대전사와 서로 마주하며 매우 그윽하고 적막하다. 적조암은 백련암 뒤쪽, 액암(額巖) 아래에 있으며, 청련암은 도암(陶庵) 혹은 동암(東庵)이라고도 하는데, 대전사의 뒤쪽 장군암 아래에 있다. 이상의 암자는 대전사 주변에 있는데 반해 학소암은 학소대(鶴巢臺) 아래에 있다. 박인조(朴麟祚)의 『주왕산수록(周王山水錄)』에 「백련암」을 제목으로 칠언절구 한 수가 있다.
백련암재벽산서(白蓮庵在碧山棲)[백련암이 푸른 산의 서쪽에 있으니]
청쇄의여은자서(淸灑疑如隱者棲)[맑고 깨끗하여 은자가 사는 곳 같구나]
원객주저방욕문(遠客躊躇方欲問)[멀리서 온 객이 주저하다 찾으려니]
일성종락보초제(一聲鍾落報招提)[한 줄기 종소리 사찰임을 알리네]
[김재찬의 「옥녀봉」]
명산을 찾는 이유 중 하나는 다양하면서도 기이하게 펼쳐진 봉우리를 감상하는 데 있다. 주왕산은 하늘을 떠받치듯 우뚝 솟아난 봉우리가 있는가 하면, 비단 병풍을 펼치듯 아름답게 드리운 봉우리가 있다. 유산록에 수록된 봉우리만 하더라도 20여 개에 달한다. 가장 많이 언급되는 봉우리를 순서대로 나열하면, 연화봉(蓮花峰), 향로봉(香爐峰), 급수봉(汲水峰), 비로봉(毘盧峰), 증봉(甑峰), 칠성봉(七星峰), 옥녀봉(玉女峰), 옥순봉(玉筍峰) 등이다.
연화봉은 푸른 계곡을 의지해 홀로 나타나 새롭게 피어난 부용(芙蓉)과 비슷하다 하여 연화봉이라고 한다. 연화봉 아래에 굴이 있는데, 마치 꽃 가운데 꽃술과 같아 사람들이 연화굴이라 부른다. 증봉은 일명 시루봉이라고 하는데, 높이는 50길[12m 또는 15m]이고 크기는 백 아름[두 팔을 둥글게 모아서 만든 둘레] 정도이며, 위는 마치 시루처럼 둥글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김재찬(金在燦)[1811~1888]은 「옥녀봉」을 제목으로 애잔한 칠언절구를 남겼다.
옥녀신장도해남(玉女新糚渡海南)[옥녀가 단장하고 남쪽 바다를 건너서]
월명비하효운암(月明飛下曉雲庵)[밝은 달밤에 날아와 효운암에 내렸네]
도인일거한무몽(道人一去寒無夢)[도인이 떠나가자 쓸쓸히 잠들지 못하고]
자애화용부벽담(自愛花容俯碧潭)[스스로 꽃을 사랑하여 푸른 못을 굽어보네]
[박인조의 「기암」]
주왕산은 많은 봉우리를 품고 있어 기이한 바위[巖]가 즐비하다. 유산록에 수록된 암명(巖名)을 보면, 복암(腹巖), 기암(旗巖), 병암(屛巖), 와룡암(臥龍巖), 마고암(麻姑巖), 장군암(將軍巖), 고루암(鼓樓巖) 등 20여 개에 이른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이 언급된 바위는 복암이다. 복암은 골짜기가 북쪽으로 끝난 곳에 층암(層巖)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으며, 돌길 한 줄기는 사람이 겨우 배를 붙이고 지나갈 수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복암은 반암(攀巖), 부암(附巖)으로 불리기도 한다.
기암은 골짜기 입구로부터 시냇물을 따라 몇 리쯤 올라가면 우뚝이 바위가 하늘을 떠받치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전해지는 말로는 신라의 왕이 적병을 피해 이곳에 와서 깃발을 세워 좌우를 바라보며 지휘하여 적세의 완급을 살폈는데 지금도 움푹 팬 흔적이 있다고 한다. 기암을 예전에는 수기암(竪旗巖)이라고도 불렀다. 기암과 마주한 바위가 장군암인데 깎아지듯 높이 솟아 있어서 오르기가 쉽지 않다. 전하는 말로는 신라왕이 적병을 피하여 왔을 때 대장이 진을 쳤던 곳이라 한다. 와룡암은 바위 위에 용의 발톱 자국이 얼룩하게 파여 있고 형상은 용이 누워 있는 것과 같아 이렇게 이름 지어졌다. 다음은 박인조의 『주왕산수록』에 실려 있는 「기암」이란 칠언절구이다.
압지기암형삽천(壓地旗巖逈揷天)[땅을 누른 기암은 멀리 하늘에 솟았고]
전인여겁후인전(前人餘㤼後人傳)[앞사람이 남긴 세월 후인에게 전해지네]
청산불로인항세(靑山不老人恒世)[청산은 푸르고 사람도 늘 세상에 전해져]
암여인전만억년(巖與人傳萬億年)[바위와 사람이 억만년이나 전해지네]
[서효원의 「가학루」]
명산의 누대는 절경을 앙부(仰俯)[아래를 굽어보고 위를 우러러봄]할 수 있는 곳에 있어 그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유산 과정에서 쉬어 갈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유산록에 수록된 누대 가운데 누(樓)는 가학루(駕鶴樓), 옥제루(玉帝樓), 찬경루(讚慶樓), 용화루(龍華樓)가 있으며, 대(臺)는 망학루(望鶴樓), 취선대(醉仙臺), 학소대(鶴巢臺), 풍경대(風勁臺), 급수대(汲水臺)가 있다. 유산자가 가장 많이 찾은 누대는 가학루와 학소대이다. 가학루는 주왕암 앞에 있는데 누각에 오르면 이 산의 절경을 모두 볼 수 있다. 기암괴석이 머리 위로 우뚝 솟아 있고 학소대가 오른쪽에 버티고 있으며 기암이 골짜기 입구를 막으며, 연화봉과 취선대가 눈앞에 나열해 펼쳐져 있다.
학소대는 급수봉과 같은 산기슭에 있으며, 취선대와는 한 굽이의 거리가 있다. 겹겹의 산이 얽히어 만 길의 기이한 봉우리가 나타나는데, 허공에 우뚝 솟아 벽이 서 있는 것처럼 깎아질렀고 칼끝처럼 뽀족한 것이 학소대다. 선경의 바람이 시원하고 하늘에 솟아오른 것 같은 풍경을 지닌다. 전하는 이야기로, 옛날에 두 마리의 학이 이곳에 와서 둥지를 틀었는데, 한 사냥꾼이 한 마리를 쏘아 죽이자 다른 한 마리는 구름 사이로 날아가 버렸다. 사냥꾼이 자기의 집에 돌아오니 가족들이 모두 갑자기 죽었다고 한다. 다음은 선향(仙鄕)에 비유한 서효원(徐孝源)의 「가학루」이다.
만학연하정일루(萬壑烟霞挺一樓)[골짜기마다 안개 노을 누각이 솟았는데]
등임고의석양두(登臨高倚夕陽頭)[올라가서 높다랗게 석양 끝에 기대네]
총암열극운중립(叢巖列戟雲中立)[빽빽한 바위 창처럼 구름 속에 늘어섰고]
화동현애수상부(畵棟懸崖水上浮)[화려한 기둥은 벼랑에 매달려 물 위에 떠 있네]
왕자미장경겁지(王子迷藏經劫地)[왕자가 숨어들어 영겁의 세월 지났고]
과아완착비공추(夸娥剜斲費功秋)[과아가 깎고 새기는 공력을 소비한 때라]
차간시식선원재(此間始識仙源在)[여기에 신선 세계 있는 줄 비로소 알았으니]
불필어랑갱멱주(不必漁郞更覓舟)[어부에게 다시 배를 찾게 할 필요는 없다네]
그 외 유산자들이 답사한 곳을 열거하면 굴(窟)로는 주왕굴(周王窟), 연화굴(蓮花窟), 연하굴(煙霞窟), 나왕굴(羅王窟) 등이 있으며, 방(坊)에는 삼위동(三圍洞), 청학동(靑鶴洞), 폭포동(瀑布洞), 용추동(龍湫洞), 둔세동(遯世洞), 주방동(周防洞), 삼의동(三宜洞), 내원동(內院洞), 사창동(司倉洞)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