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21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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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時代 |
영어공식명칭 | Chosŏn Period |
분야 | 역사/ 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구리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미엽 |
[정의]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조선 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의 경기도 구리 지역의 역사와 문화.
[개설]
고려 말 현 구리 지역이 속한 양주(楊州)는 풍수지리상 길지(吉地)로 인식되었고 조선의 건국과 함께 한양이 도읍지가 되면서 경기도의 중앙으로서 역할이 커졌다.
[행정 구역의 변천]
조선의 지방 제도는 전국을 8도로 나누고 8도 아래에 부·대도호부·목·군·현의 행정 구역을 두었으며, 이 중 경기도는 4개의 목, 7개의 도호부, 7개의 군, 19개의 현으로 구성되었다. 구리 지역이 속한 양주는 시기에 따라 행정 구역의 등급이 변하였다.
1394년(태조 3) 지금의 서울 지역이 조선의 도읍이 되면서 한양부는 한성부로 개칭되고 양주의 치소(治所)는 아차산 남쪽 대동리[현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로 옮겨졌으며, 이때 양주는 지양주사(知楊州事)로 강등되었다. 1395년(태조 4) 양주부로 다시 승격되고, 1397년(태조 6) 양주의 치소가 고주내[현 양주시 고읍리]로 옮겨졌다. 1410년(태종 10) 양주목으로 승격되었다가, 1413년(태종 13) 양주 도호부로 강등되었다. 그러나 1466년(세조 12) 다시 양주목으로 승격되고, 풍양현을 속현으로 두었다. 1504년(연산군 10) 양주목을 폐지하고 왕의 사냥터로 만들었으나, 1506년(중종 1) 다시 양주목으로 복구되고 치소를 불곡산 남쪽[지금의 양주시 주내면 유양리]으로 옮겼다.
구리의 옛 명칭은 구지(龜旨, 九旨)라 하는데,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구지(龜旨)라는 명칭이 처음 나오며, 영조 대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양주 관할하에 구지·별비곡(別非谷)·진관(眞官)·망우리(忘憂里)·해등(海等)·미음(美音)·노원(蘆原)을 포함한 32개의 면리가 있다.
[임진왜란과 구리 지역 ]
조선시대 구지면은 한양의 흥인문(興仁門)에서 망우리 고개를 넘어 강원도로 가던 길목이자, 조선 태조의 능인 건원릉(健元陵)이 있는 곳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날 당시 동구릉에는 건원릉과 현릉이 자리하고 있었다. 왜군이 빠른 속도로 북진하여 수도 한양이 함락되자 건원릉이 있던 구지면도 왜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때 고언백(高彦伯)이 검암산(劍岩山)을 근거지로 하여 도원수 김명원 휘하에서 공을 세웠으며, 이후 양주에서 병사를 모아 왜병과 전투를 벌이며 건원릉을 수호하였다. 평양과 함경도까지 진출하였던 왜적은 각 지역 의병들의 활동과 이순신 장군의 수전 승리 등으로 후퇴하기 시작하였으며, 결국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사망과 함께 7년 간의 전쟁은 끝맺게 되었다.
[조선 후기]
161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조선 정부와 백성들은 다시 큰 고통을 겪어야 했고, 양난(兩難)을 계기로 조선은 정치· 경제·사회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최고의 정무 기관은 비변사가 대신하였고, 중앙의 군사 제도는 훈련도감과 5군영 체제로 전환하였으며 지방의 군제는 속오군(束伍軍)으로 운영되었다. 조세에 있어서도 토지세는 영정법(永定法)으로, 공물은 현물로 징수하는 대동법(大同法)으로, 군역(軍役)은 균역법(均役法)으로 바뀌었다.
또한 농업 생산력의 증가와 상품 경제의 발달로 인해 지주제가 확대되고 부농층이 성장하였으며 어물을 독점하던 양주의 누원점 상인(樓院店商人) 등이 등장하였다. 따라서 부를 통한 신분 상승이 가능해지고 몰락한 양반이 늘어나면서 신분제는 동요하였으며, 실사구시(實事求是)와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실학 운동이 일어남으로써 성리학적 질서에 바탕을 둔 중세 사회가 해체되어 갔다.
[조선시대 유적]
구리 지역은 길지로 알려져 조선 최대의 왕릉군인 구리 동구릉[사적 제193호]이 조성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구리 동구릉 건원릉 정자각[보물 제1741호], 구리 동구릉 숭릉 정자각[보물 제1742호], 구리 태조 건원릉 신도비[보물 제1803호] 등의 문화재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