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 보상 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327
한자 國債報償運動
영어공식명칭 The National Debt Compensation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07년 3월 20일연표보기 - 국채 보상 운동 시작
종결 시기/일시 1910년 4월 18일연표보기 - 국채 보상 운동 종결
발생|시작 장소 국채 보상 운동 - 경상북도 성주군
종결 장소 국채 보상 운동 - 경상북도 성주군
성격 사건|사회 운동
관련 인물/단체 이승희|김창숙|이덕후|도갑모|김원희|이진석|배동옥|이항주

[정의]

1907년 성주 지역에서 나라 빚을 국민들의 모금으로 갚고자 일어난 국권 수호 운동.

[개설]

국채 보상 운동(國債報償運動)은 1907년부터 1908년 사이에 일본으로부터 빌려 쓴 국채를 국민들의 모금으로 갚기 위해 벌인 거족적(擧族的)인 애국 운동이다. 경상북도 성주 지역에서는 1907년 3월 20일 성주군 국채보상의무회가 설립되었고, 한계(韓溪) 이승희(李承熙)[1847~1916]가 회장, 이덕후(李德厚)가 부회장에 추대되었다. 1908년 5월 이승희가 연해주로 망명한 뒤에는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1879~1962]이 계승하여 이끌었다.

[역사적 배경]

1907년 1월 29일 대구광문사(大邱廣文社)의 문회(文會)에서 결성된 대동광문회(大東廣文會)가 국채 보상을 발의하고, 2월 초순에 「국채보상취지서(國債報償趣旨書)」 각처로 배포하였다. 1907년 2월 21일 북후정(北堠亭) 민중 대회(民衆大會) 이후 대구민의소가 대구금연상채회 명의로 된 「통문(通文)」과 「금연상채회규칙(禁煙償債會規則)」을 각 지역으로 발송했고, 성주 지역에도 이 통문이 도착하였다.

[경과]

성주 유생 이승희국채 보상 운동에 참여하자는 통문을 성주 향중에 보내고, 3월 20일 성주 장날에 모임을 가지기로 하였다. 이때 성주 향내에 통문을 보내 다음 달 초 6일을 의무회(義務會) 발의일(發議日)로 정하였다. 곧이어 이승희는 경상남도 지방의 호소 통문을 짓고, 향약의 조직 원리를 변용한 국채보상회 조직의 규칙을 만들었다. 그리고 경남 지방 국채보상회의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추대 이유는 이승희가 한주학파를 주도하는 유생이었고, 한주학파가 경상남도를 비롯한 경상우도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07년 3월 20일[음 2월 7일] 성주군 국채보상의무회가 설립되었고, 회장으로 이승희, 부회장으로 이덕후가 추대되었다. 국민이 국채 보상에 참여하고 의연금을 내는 데는 상하의 구분이 없었다. 군수 김흥기(金興基)가 즉석에서 백 원을 의연하고 눈물을 흘리며 그 애국심에 사례했고, 전라남도 광주의 부싯깃 장사 장도선(張道宣), 두채상 장경보(張京甫 혹 用)의 처 김씨, 기녀(妓女)와 과부(寡婦) 등의 부인들도 반지와 비녀를 의연하였다.

이승희는 「성주군의무소국채보상취지서(星州郡義務所國債報償趣旨書)」에서 헌금을 국민의 당연한 도리로 강조하였다. 자신의 가사를 돌보지 않고 국채 보상 운동에 전념하여 회갑연으로 쓸 20원을 의연하기도 하였다. 그 외 전승지 장석신(張錫藎), 가난한 노동자 김달곤(金達坤), 상민 김사일(金士日) 등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08년 5월 이승희가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뒤에는 김창숙이 성주군 국채보상의무회를 이끌어 갔다. 그러나 국채 보상 운동은 1907년 6월 이후 국채 보상을 위해 출연된 의연금의 관리에 대한 의혹이 전국적으로 증폭되면서 열기가 점차 식어갔고, 일제의 방해 공작이 노골화되면서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1908년 7월 국채 보상금 처리 문제가 제기된 이후, 김창숙은 1910년 4월 18일 열린 국채보상금처리회(國債報償金處理會) 전국 대표자 회의에 성주군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러나 김창숙은 일진회 등 친일 세력의 개입에 실망하여 탈퇴하고 귀향하였다. 이어 김원희(金元熙)·도갑모(都甲模)·이항주(李恒柱)·이진석(李晉錫)·배동옥(裵東玉) 등과 상의하여 성주군에서 보관하던 국채 보상금 10여만 원을 기초로 청천서당(晴川書堂)[경상북도 유형 문화재]에 사립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설립하였다.

[결과]

성주군 국채보상의무회는 이승희와 그의 문인 김창숙이 주도하였다. 이승희는 성주군 국채보상의무회의 회장이 되어 향약의 조직 기반을 통해 성주 지역의 모든 계층을 동원했고, 나아가 경상남도 지방의 국채보상회 규칙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1908년 보수적인 유림이던 이승희는 국권 회복의 한계를 절감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였다. 이후 김창숙이 계승하며 국채 보상 운동은 계몽 운동에서 실력 양성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의의와 평가]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 보상 운동은 전국 각처로 확산되어 범국민 운동으로 전개되다가, 일제의 방해 공작과 보상금 전용 문제가 제기되면서 그 열기가 식고 말았다. 그러나 국채 보상 운동은 계몽 운동에서 실력 양성 운동으로 발전하며 한국 민중들의 국가 의식을 고취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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