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754
한자 郭伊用
영어공식명칭 Gwak Iyong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권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5년 12월연표보기 - 곽이용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7년 10월 - 곽이용 박타관 의진에 투신
활동 시기/일시 1909년 4월 19일 - 곽이용 일본 헌병대에 체포
활동 시기/일시 1909년 6월 17일 - 곽이용 공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음
몰년 시기/일시 1910년 3월 14일연표보기 - 곽이용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16년연표보기 - 곽이용 건국 훈장 애국장 추서
출생지 곽이용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지도보기
활동지 곽이용 활동지 - 경상북도 구미시
활동지 곽이용 활동지 - 경상북도 김천시
활동지 곽이용 활동지 - 경상북도 칠곡군
활동지 곽이용 활동지 - 충청북도 영동군
성격 의병
성별

[정의]

개항기 성주 출신 의병.

[활동 사항]

곽이용(郭伊用)[1875~1910]은 1875년 12월 경상북도 성주군 천창면(千倉面)[현 가천면]에서 태어났다. 1905년 11월 외교권을 빼앗긴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전후해서 일어난 의병 항쟁이 1907년 7월의 고종 퇴위와 8월의 군대 해산을 계기로 절정기에 이르렀다. 국권 회복을 위한 의병 투쟁이 대일 전쟁의 모습을 띠며 전개되었다. 당시 곽이용도 울분을 견디다 못해 박타관 의진(朴他官義陣)에 투신하여 활동하였다. 박타관 의진은 경상북도 선산군(善山郡)[지금의 구미시]과 개령군(開寧郡)[지금의 김천시] 일대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곽이용은 1907년 10월경 9명의 의병과 함께 경상북도 선산군 삽재리와 다부동, 개령군 송곡리, 김산군 봉학동 등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 칠곡군, 김천시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09년 1월과 2월 사이에는 여러 명의 의병과 함께 충청북도 황간군 매하면 교동·임산리, 상촌면 하물한리·하도대리, 오곡면 오곡리·광평리 등 지금의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과 매곡면 일원에서 군자금과 군수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1909년 4월 19일에도 활동을 펼치다 일제 헌병대의 기습을 받고 박타관 등과 함께 붙잡혔으나, 동지들과 함께 옥문을 부수고 탈출에 성공하였다. 1909년 5월 16일 충청북도 황간군 오곡면[지금의 영동군 매곡면]에서 다시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이던 중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고, 박타관은 총에 맞고 순국하였다. 이어 같은 해 6월 17일 공주지방재판소에서 강도·강도 살인·방화·죄수 도주·추포 항거(追捕抗拒) 등의 혐의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불복하여 항소했으나 10월 20일 경성공소원(京城控訴院)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했으나 1910년 1월 27일 고등 법원에서 기각되었고, 1910년 3월 14일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2016년 건국 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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