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1324
한자 養兒錄
영어공식명칭 Yangarok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전적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최은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술 시기/일시 1551연표보기~1566년연표보기 - 『양아록』 저술
소장처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격 일기
저자 이문건(李文楗)[1494~1567]
권책 1책
문화재 지정 번호 서울특별시 유형 문화재

[정의]

1551년부터 1566년까지 조선 전기 문신 이문건이 성주 유배 생활 중에 손자의 양육에 관해 쓴 일기.

[저자]

이문건(李文楗)[1494~1567]의 본관은 성주(星州)이며, 자는 자발(子發), 호는 묵재(默齋)·휴수(休叟)이다. 부친은 이윤탁(李允濯)[1462~1501]이며, 모친은 신회(申澮)의 딸 고령 신씨(高靈申氏)이다. 일찍이 중형 이충건(李忠楗)과 함께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서 학업을 수학하였으며, 1513년(중종 8)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546년 명종 즉위 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족친 이휘(李輝)가 화를 입었고, 이에 연루되어 성주에서 23년간 유배 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끝내 풀려나지 못한 채 성주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편찬/간행 경위]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성주로 유배되었을 때 가족들이 함께 성주로 이거하였고, 유배 생활 중 이문건의 나이 58세 때 손자 이수봉(李守封)[1551~1594]을 얻었다. 이문건은 안동 김씨(安東金氏)와 혼인하여 자식 여섯을 두었는데, 모두 일찍 사망하고 성년까지 생존한 자녀는 아들 이온(李熅)[1518~1557]뿐이었다. 이온의 아들이 바로 이수봉이다. 이문건은 손자 이수봉이 태어난 1551년(명종 6)부터 1566년(명종 21)까지, 손자를 양육하는 과정을 시문과 산문 형식을 결합하여 『양아록(養兒錄)』을 기술하였다.

[형태/서지]

1책의 필사본으로 현존하는 유일본이다.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소재한다[개인].

[구성/내용]

『양아록』은 서문, 시, 산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크게 3단 구성을 보이는데, 먼저 본인의 자서(自序)와 손자 출생 시의 기쁨을 담은 시, 출생 당시의 상황과 개명에 대해 언급한 글, 성주목사와 조카가 보내준 축시가 나오고, 다음으로는 손자 이수봉을 양육하는 내용의 시들이 나오며, 마지막으로 음주에 대한 경계, 가족에 대한 소개, 세계(世系), 축원문, 자신의 성품에 대해 자책하는 글로 이루어져 있다. 시는 창작 시기에 따라 연도별로 되어 있고, 산문은 시의 내용과 관련 있는 것은 시의 앞뒤에 두었다. 시의 제목을 통해 내용을 분류하자면, 손자 이수봉의 성장과정, 질병과 사고, 교육, 아들인 이온의 죽음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는 손자에 대한 사랑이 주된 내용이다. 벌레와 해충에 시달리는 손자 수봉의 모습을 보면서 “이와 벼룩을 차라리 내게 오게 하라. 애련하구나 젖먹이 물어 뜯지 말라.”라고 탄식하면서 대신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반대로 손자가 독서를 흉내 내는 모습을 보고 장래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또한 자라면서 생긴 나쁜 습관과 버릇 등을 고치기 위해 손자의 종아리를 때리거나 호되게 야단을 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등 섬세하고 자상한 할아버지이자 양육자로서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이는 단순히 할아버지와 손자의 소통을 넘어서 가문 계승으로 이어지기를 희망하는 기록적 의미를 지닌다. 중앙 정계에서 밀려나고 절손을 걱정해야 하는 현실적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안이 손자의 출생과 교육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쇠미해져 가는 가문 네가 지탱하여, 수천 년까지 이어가게 해야 하리.”와 같은 구절에서 이러한 생각이 잘 드러난다. 이문건은 서문에서 노년에 성주에서 귀양살이 하는 동안 무료해서 글을 쓴다고 밝힌 바 있는데, 자신이 처한 유배의 상황 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잇단 죽음으로 인한 비극적 상황을 손자 양육과 글쓰기를 통해 극복하고자 하였다.

[의의와 평가]

16세기 사대부 남성이 출생부터 16세까지의 양아(養兒)를 직접 기록했다는 측면에서 자료의 가치가 있으며, 구체적으로 양육자의 태도와 진솔한 감정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그리고 16세기 사대부 가문 아동의 개인 질병의 집적물로, 치병 일기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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