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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0722
한자 崔山斗紀忠閣碑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유등면 건곡리 339-9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서홍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483년 - 최산두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536년 - 최산두 사망
건립 시기/일시 1929년 12월연표보기 - 최산두 기충각비 건립
현 소재지 최산두 기충각비 현 소재지 - 전라북도 순창군 유등면 건곡리 339-9 지도보기
성격
관련 인물 최산두(崔山斗)[1483~1536]
재질 화강암[대석·옥개석]|대리석[비신]
크기(높이,너비,두께) 167㎝[높이]|64㎝[너비]|28㎝[두께]
소유자 초계 최씨 종회
관리자 초계 최씨 종회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유등면 건곡리에 있는 일제 강점기에 최산두를 기리기 위해 세운 사적비.

[개설]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1483~1536]는 중종 때의 학자이자 정치가로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경앙(景仰), 호는 신재(新齋)이다. 중종 대에 사간원 정언·홍문관 수찬 등을 지냈고 왕에게 『성리대전(性理大全)』을 강론할 정도로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 그러나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동복[현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에서 15년간 긴 유배 생활을 하였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 얼마 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건립 경위]

최산두 기충각비(崔山斗紀忠閣碑)는 1929년 12월 13세손 최봉수가 세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최산두는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도원 서원(道源書院)에 제향되어 있지만, 본손(本孫)이 모여 사는 순창군 유등면 전곡리에 기충각을 세우고 비를 세웠다고 한다.

[위치]

최산두 기충각비순창군 순창읍 지방도 730호선에서 유등면 소재지를 향해 가면 나오는 건곡 마을 어귀 도로변에 있다. 최산두 기충각비 뒤편 마을 쪽에 기충각이 있다. 주소지는 순창군 유등면 건곡리 339-9번지이다.

[형태]

화강암의 방형 대석(臺石) 위에 흰색의 대리석 비신(碑身)을 세우고 화강암의 옥개석(屋蓋石)을 얹었다. 야외에 노출되어 있지만 건립한 지 80여 년밖에 되지 않아 형태가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 비의 크기는 높이 167㎝, 너비 64㎝, 두께 28㎝이다.

[금석문]

비의 전면에 ‘기충각비(紀忠閣碑)’라고 전서로 두전(頭篆)을 새겼고, 후면은 두전 없이 음기(陰記)만 기록하였다. 비문은 해서체로 송지헌(宋之憲)이 짓고 썼다. 비문에 의하면 최산두는 기묘사화 때 의정부 사인으로써 동복현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15년 만에 풀려났으나 우울증으로 병이 나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밝은 세상이 돌아왔어도 유독 최산두에게만은 조정의 은택이 미치지 못한 것은 지역이 외지고 후손이 침체하여서이다. 그러다가 1923년 호남선비들이 후손들과 함께 대동사문회(大同斯文會)에 뇌행문(誄行文)을 청하니 그때에 사문회에서 사시(私諡)를 정하는 규례가 있어 문절(文節)이라 의결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었다.

[현황]

마을 어귀의 도로변에 있어 눈에 잘 띈다. 비의 주변 사면에 스테인리스 난간을 만들어 출입을 금하고 있는데, 이 난간이 격에 맞지 않는 구조물로 보이는 게 아쉽다. 초계 최씨(草溪鄭氏) 종회에서 소유하여 관리한다.

[의의와 평가]

비문 글자가 매우 잘 새겨져 있다. 특히 안진경(顔眞卿)과 유공권(柳公權) 풍의 해서체를 미려하게 잘 표현한 금석문의 수작이라 하겠다. 순창 지역뿐 아니라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해서 글씨이다. 또한 두전은 강직한 필선을 가미한 소전(小篆)으로 기충각이라는 의미에 부합되게 힘차고 절제된 전서체로 쓰여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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