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7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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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洪鍾哲妻晉州姜氏事蹟碑 |
이칭/별칭 | 효열부 진주 강씨 사적비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유등면 무수리 134-1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진돈 |
현 소재지 | 홍종철 처 진주 강씨 사적비 현 소재지 - 전라북도 순창군 유등면 무수리 13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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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비 |
관련 인물 | 홍종철 |
재질 | 화강암[좌대·개석]|오석[비신] |
크기(높이,너비,두께) | 비신 125㎝[높이]|41㎝[너비]|18㎝[두께], 좌대 72㎝[높이]|50㎝[너비]|22㎝[두께], 개석 70㎝[높이]|50㎝[너비]|33㎝[두께] |
소유자 | 홍성윤 |
관리자 | 최옥자 |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유등면 무수리에 있는 일제 강점기 진주 강씨의 효열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개설]
진주 강씨(晋州姜氏)는 강영준의 딸로 대제학 문량공(文良公) 강희맹(姜希孟)의 후손이다. 세상 사람들이 태어나면서 정숙함을 지녔다고 하였다. 어려서부터 부모를 한결같이 아침저녁으로 정성스럽게 살핌과 동시에 곁에서 항상 부드러운 목소리로 모셨다. 어버이가 병이 생기자 마음을 졸이며 약을 달이고 죽을 끓였다. 성장하여 남양 홍씨(南陽洪氏) 홍종철(洪鐘哲)에게 시집가서는 친정 부모를 섬기는 것처럼 시부모를 봉양하였다. 시부모가 병을 얻자 백방으로 약을 구하였으며 마음을 다해 조치하였고, 나중에는 위급함에 이르자 손가락을 잘라 입에 피를 먹이니 수일을 더 연명하였다. 상을 당해서는 상례에 따라 염빈(殮嬪)[시체를 염습하여 관에 넣어 안치함]을 다하여 치른 공로가 있고, 아들 홍순형(洪淳炯)도 어머니의 뒤를 이어 효우(孝友)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건립 경위]
비석 우측 자손 명단에 아들 홍순형, 손자 홍일표·홍경표, 종손 홍창표·홍관표, 사위 오홍린·김용섭·이호린·김용섭, 조카사위 박종호·이봉교·허만·정수조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이 함께 비석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건립 연도는 기묘년인데, 일제 강점기인 1939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위치]
홍종철 처 진주 강씨 사적비는 적성면 행정복지센터에서 남동쪽 도로를 따라가다 섬진강을 건너 약 1,100m 되는 무수 마을 도로변에 있다. 주소지는 순창군 유등면 무수리 134-1번지이다.
[형태]
개석(蓋石)과 좌대(座臺)는 화강암을 사용하였으며, 비신(碑身)은 오석(烏石)이다. 비석의 크기는 좌대 높이 72㎝, 너비 50㎝, 두께 22㎝이고, 비신 높이 125㎝, 너비 41㎝, 두께 18㎝이며, 개석 높이 70㎝, 너비 50㎝, 두께 33㎝이다. 담을 두르고 입구는 작은 문을 달아 경계를 표시하였는데 그리 높지 않다.
[금석문]
전면의 글씨와 음기(陰記)는 모두 해서로 썼으며, 우측에는 자손들 명단을 기록하였다. 찬자는 가선대부 승정원 우승지 동래 정인욱이 하였고, 글씨는 손자 홍일표가 썼다. 전면에는 “효열부 진주 강씨 사적비(孝烈婦晉州姜氏事跡碑)”라고 쓰여있으며, 음기에는 강씨의 사적을 적고 있다.
[현황]
후손인 홍성윤이 소유하고, 광주에 사는 최옥자가 관리한다. 효열부 진주 강씨 사적비라고도 한다.
[의의와 평가]
『순창 군지』에 진주 강씨는 시어머니가 병들자 손가락을 끊었고, 남편이 병이 나자 역시 손가락을 쪼개어 피를 입을 대어 쾌히 회춘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순창군 유등면 무수 마을 어귀에 효열비를 세워 마을 사람들에게 효열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기 위해 비를 세운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