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8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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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陽洪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성용 |
세거|집성지 | 남양 홍씨 세거지 -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 매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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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시조 | 홍은열(洪殷悅) |
입향시조 | 홍윤희(洪允熙) |
[정의]
홍은열을 시조로 하고 홍윤희를 입향조로 하는 전라북도 순창군 세거 성씨.
[개설]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홍은열(洪殷悅)을 시조로 하고, 본관을 남양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순창 지역 남양 홍씨 입향조는 소위 장군(昭威將軍) 홍윤희(洪允熙)다. 2000년 통계청의 인구 조사 자료에 따르면 남양 홍씨[당홍계]는 전국적으로 1만 7638가구, 37만 9708명이 거주하고 있다.
[연원]
남양은 지금의 경기도 수원시와 화성시 일원을 포함한 지역의 옛 지명이다. 남양 홍씨는 시조를 달리하는 당홍(唐洪)과 토홍(土洪)이 있다. 당홍은 고구려 때 당(唐)나라에서 귀화한 홍학사의 후예인 홍은열(洪殷悅)이다. 토홍은 고려 고종(高宗) 때 금오위 별장을 지낸 홍선행(洪先幸)의 후손이다. 당홍과 토홍이라는 호칭은 귀화파와 토착파의 구분에서 연유한다. 두 계보의 근원이 같은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토착파인 토홍의 역사보다 귀화파인 당홍의 역사가 300년 이상 길다.
당홍의 시조 선대는 고구려 제27대 왕인 영류왕(榮留王) 때 중국 당나라에서 8학사의 한 사람인 홍천하(洪天河)가 고구려에 들어와 유학을 가르치는 등 문화 활동을 펼치다가 연개소문(淵蓋蘇文)의 난 때 신라로 피신하였다. 신라 제27대 왕인 선덕 여왕(善德女王) 때 유학의 발전에 공을 세워 당성[남양의 옛 이름]백에 봉하여졌고 태자태사가 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본관을 당성으로 하였다. 당성이 후에 남양으로 바뀌어 본관을 남양으로 하였으나, 그 이후의 계대가 확실치 않아 고려 개국 공신으로 삼중대광 태사(三重大匡太師)를 지낸 홍은열을 기세조(起世祖)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홍은열은 원래 이름이 홍유(洪儒)였는데 고려 개국에 공을 세워 태조(太祖)가 “은(殷)나라 부열(傅說)[부열은 중국 은나라 고종 때의 명재상]과 같다.”며 ‘은열’이란 이름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당홍의 세계는 시조의 12세손에서 13파와, 그 밖의 2파, 도합 15파로 대별되는데, 그중 벼슬을 지낸 내력과 후손의 수가 많은 것은 남양군파(南陽君派)·문정공파(文正公派)·판중추공파(判中樞公派)·익산군파(益山君派)·예사공파(禮史公派)·중랑공파(中郞公派) 등 6파이다. 이 중에서도 남양군파와 문정공파의 후손이 특히 많아 당홍의 70%를 차지하고, 익산군파가 15%로 다음 간다고 한다. 당홍은 조선 시대에 상신 8명, 대제학 2명을 비롯하여 왕비 1명, 청백리 3명, 부마 4명, 공신 10여 명을 배출하였다.
[입향 경위]
홍윤희가 16세기 초 전라남도 강진에서 처가인 순창 설씨(淳昌薛氏)를 따라 금과면 매우리로 들어왔다. 홍윤희의 아들인 삼외당(三畏堂) 홍함(洪涵)은 1577년(선조 10)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지냈고, 홍윤희의 현손인 홍구(洪構)는 1708년(숙종 24)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 정랑과 사헌부 집의를 지냈다. 홍구의 두 형인 홍운(洪橒)과 홍훤(洪楦)은 모두 진사에 합격하였다. 또 1814년(순조 14)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 참지를 지낸 홍구섭(洪龜燮)은 홍구의 현손이다. 이와 같이 3명의 문과 급제자와 여러 명의 사마시 합격자를 배출하였기에 순창의 명문으로 꼽는다.
[현황]
2000년 순창 지역의 남양 홍씨[당홍계]는 205가구, 24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1989년 순창군에서 실시한 인구 통계 자료에 따르면 당시 순창 지역의 남양 홍씨[당홍계]는 금과면 모정리[현 매우리] 중모 마을[현 매우 마을]과 신모 마을[현 신매우 마을]에 24가구가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하고 있었다. 금과면 모정리는 고려 후기 마암이라 하였다가 마을 뒷산의 형상이 집안에 매화꽃이 만발한 것과 같다고 하여 ‘매화 매(梅)’ 자와 ‘집 우(宇)’ 자를 써서 매우(梅宇)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모정(茅亭)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2007년 주민들의 건의로 옛 이름을 되찾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10년 현재 금과면 매우리 매우 마을에 14가구, 신매우 마을에는 12가구가 집성촌을 이루고 세거하고 있으며, 금과면 전체에는 42가구가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관련 유적]
금과면 매우리 서쪽 언덕 바위 위에 삼외당(三畏堂)이 자리 잡고 있다. 삼외당은 홍윤희의 아들 홍함이 자신의 호를 따 지은 정자이다. 삼외당에는 백호(白湖) 임제(林悌), 청계(靑溪) 양대박(梁大樸), 오봉(鰲峰) 김제민(金齊閔) 등 세 사람의 시 3수가 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