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971 |
---|---|
한자 | 金奉鶴 |
이칭/별칭 | 태선(胎仙)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최범호 |
[정의]
조선 전기 순창 출신의 의병.
[가계]
본관 경주(慶州). 자는 태선(胎仙). 제숙공(齊肅公) 김곤(金稇)의 후손으로, 판관 김백령(金百齡)의 5세손이다.
[활동 사항]
김봉학(金奉鶴)[1515~1592]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8세의 고령으로 김극복(金克福)·이팽령(李彭齡) 등과 함께 종을 거느리고 금산(錦山)으로 달려가서 초토사 고경명(高敬命)[1533~1592]의 막하로 들어갔다. 7월 9일부터 10일까지 의병 및 관군과 합세하여 왜군과 금산 전투에서 함께 싸웠다. 고경명 의병은 곽영이 이끄는 관군과 함께 진산을 거쳐 7월 9일 금산에 도착하여 금산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왜군은 성 위에서 조총 사격으로 조선군의 접근을 저지하려고만 할 뿐 적극적인 대항을 하지 않았다.
다음날인 7월 10일 아침 고경명은 금산성 서문을 공격 목표로 잡고 의병의 주력을 서문 공격에 투입하였다. 그때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1533~1597]는 조선군의 관군이 허약한 것을 보고 동문으로 출진하여 관군을 공격하였다. 왜군의 선제공격을 받은 관군은 차례로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이에 의병들도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왜군은 이 틈을 타서 일제히 공격해 왔고, 고경명은 끝까지 군대를 독려하며 대항하였다. 이때 아군이 왜군에게 무너져 고경명이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김봉학은 말을 타고 뛰어 들어갔다. 고경명을 구하려 하였으나 끝내 순절하였고, 많은 의병과 관군이 희생을 당하였다. 이 전투에서 비록 관군과 의병이 금산성 탈환에는 실패하였지만, 왜군이 전주로 진출하는 것을 저지하는 데는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