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9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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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蔡英贊 |
이칭/별칭 | 채기문(蔡基文)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 도고리 395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정훈 |
출생 시기/일시 | 1845년 1월 3일 - 채영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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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6년 - 채영찬 최익현 의진에서 의병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 채영찬 순창·태인 등지에서 의병 활동 |
몰년 시기/일시 | 1907년 4월 20일 - 채영찬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68년 - 채영찬 대통령 표창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77년 - 채영찬 건국 포장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채영찬 애국장 추서 |
출생지 | 채영찬 출생지 -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 도고리 395 |
활동지 | 채영찬 활동지 - 전라북도 순창군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최익현 의진 대포장 |
[정의]
개항기 순창 출신의 의병.
[활동 사항]
채영찬(蔡英贊)[1845~1907]은 1845년(헌종 11) 현재의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 도고리에서 출생하였다. 다른 이름은 채기문(蔡基文)이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국권이 상실되자 당대를 대표하던 유학자 최익현(崔益鉉)[1833~1906]은 1906년 정읍 태인에 살고 있는 임병찬과 의논하여 순창, 태인 일대를 거점으로 의병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이때 임병찬이 순창 삼방(三防)의 포수인 채영찬도 거사에 참여토록 종용하였다. 이에 채영찬은 순창, 태인 등지에서 수십 명의 의병을 이끌고 최익현 의진(義陣)에 합류하여 대포장(大砲將)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광주 관찰사 이도재가 고종 황제의 칙서를 보내와 의진을 해산하라 명하니 최익현은 이에 따랐다. 그 뒤 채영찬은 순창군 창의장 김상기(金相璣) 의병진에 가담하여, 경상북도 하동군 화개동으로 가서 광양 창의장 백낙구(白樂九)와 순천을 공격하다가 백낙구와 함께 체포되어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 1년 뒤인 1907년 유배에서 풀려난 뒤에 다시 의병 20명과 함께 순창, 태인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계속하다가 1907년 4월 20일 상인(商人)으로 가장한 일본군에게 피살되었다.
[상훈과 추모]
1968년 대통령 표창, 1977년 건국 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