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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1052
한자 李錫庸
이칭/별칭 경항(敬恒),정재(靜齋),이갑술(李甲戌)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임숙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8년 11월 29일[음력]연표보기 - 이석용 출생
몰년 시기/일시 1914년 4월 4일연표보기 - 이석용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2년연표보기 - 이석용 독립장 추서
출생지 이석용 생가 - 전라북도 임실군 성수면 삼봉3길 56-3[삼봉리 676]
묘소 소충사 - 전라북도 임실군 성수면 산성로 725-23[오봉리 산130-1]
추모비 황극단 -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 1가 산39-8
성격 의병장
성별

[정의]

개항기 전라북도 순창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장.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항(敬恒), 호는 정재(靜齋). 태어난 날의 일진(日辰)이 갑술(甲戌)이었기 때문에 ‘이갑술(李甲戌)’을 아명(兒名)으로 하였다. 아버지는 화산(華山) 이봉선(李鳳善)이며, 어머니는 조양 임씨(兆陽林氏)이다. 부인은 부령 김씨(扶寧金氏)로 겸재(謙齋) 김관술(金觀述)의 딸이다. 자녀는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이원영(李元泳)과 이우영(李祐泳)이며, 사위는 장현풍(張鉉豊)과 최학렬(崔學烈)이다. 큰아들 이원영은 의병장 고광수(高光秀)의 맏딸과 14세에 결혼하여 장손 이명근(李明根)을 낳았다. 둘째 아들 이우영은 아들 이효근(李孝根)·이경근(李景根)·이순근(李順根)·이장근(李章根)을 두었다. 2013년 12월 현재 이석용의 장손 이명근은 전라북도 광복회 임실·무주·진안·장수 연합회 회장을 역임하며 임실에 거주하고 있다.

[활동 사항]

이석용(李錫庸)[1878~1914]은 1878년(고종 15) 음력 11월 29일 지금의 전라북도 임실군 성수면 상동리 삼봉촌(三峯村)에서 태어났다.

1. 최익현의 거병에 동참

이석용은 을미사변이 일어날 무렵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심석(心石) 송병순(宋秉珣), 입재(立齋) 송근수(宋近洙),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간재(艮齋) 전우(田愚), 운람(雲藍) 정봉현(鄭鳳鉉), 최계남(崔溪南), 허남려(許南藜), 애산(艾山) 정재규(鄭裁圭), 면우(勉宇) 곽종석(郭鍾錫),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등을 두루 찾아다니며 학문을 논하였다. 1906년 면암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키고자 정읍 태인 종성리 임병찬(林炳璨)에게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3월에 최익현을 찾아가 의병에 동참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음력 4월 20일 최익현이 순창에서 패하자 자력으로 의병 활동을 하고자 결심하고, 1년 동안 전주·임실·장수·진안·남원·순창·곡성·함양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의병을 규합하였다.

2. 의병 창의 동맹 결성 및 활동

1907년 7월 24일 정미조약(丁未條約)이 맺어지자 8월 26일에 이석용은 아버지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고 떠나 동지들과 의병 활동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때 이석용은 모여 있던 의병들에게 “옛날부터 호걸들이 친척을 버리고 고향을 떠날 적에는 대개 다 장래의 영달을 희망하였거니와 나로 말하면 한갓 선비일 따름이라. 다만 대의(大義)를 만천하에 펴 보자는 것이지 성공 여부를 따질 바가 아니라 생각한다.”라고 말한 뒤 「격중가(激衆歌)」를 만들어 의병들에게 부르게 하기도 하였다. 「격중가」는 다음과 같다.

“가을바람 소슬(秋風蕭瑟)하니/ 영웅(英雄) 없이 때를 만남(得意時)이라/ 장사(壯士)가 없을 소냐/ 구름같이 모여든다/ 어화 우리 장사들아/ 격중가를 불러 보새/ 한양성중(漢陽城中) 바래보니/ 원수(寃讐)놈이 왜(倭)놈이요/ 원수놈이 간신(奸臣)이라/ 삼천리(三千里) 우리 강산(江山)/ 오백 년(五百年) 우리 종사(宗社) 어찌 할까/ 아마도 의병(義兵)을 일으켜/ 왜놈을 쫓아내고/ 간신을 타살(打殺)하야/ 우리 임금(今上) 봉안(奉安)하고/ 우리 백성 보전(百姓保全)하여/ 삼각산(三角山)이 숫돌 되고/ 한강수(漢江水) 띠 되도록/ 즐기고 놀아 보새/ 우리 대한(大韓) 만만세(萬萬歲)”

이로써 의병들의 사기를 드높이고, 9월 2일 참모들을 모아 의병대 이름을 ‘의병 창의 동맹(義兵倡義同盟)’이라 정하였다. 그리고 의병을 일으키기 전 장차 가족들이 일본에게 박해당할 것을 우려해 자신의 가족을 분산시키고 가산을 정리하여 9월 4일 운현(雲峴)의 절정(絶頂)에 처음으로 진을 쳤다. 그날 밤 진안 석전리로 가서 의병을 모집하였는데 그 수가 20여 명에 달했으며, 마을 노인들이 이석용를 보자 “이제야 의병다운 의병을 볼 수 있겠구나.”라고 외쳤다고 한다.

9월 5일 의병들을 이끌고 진안군 백운면 백암리로 출발하였으며 홍도령(虹度嶺)에 이르러 진을 가다듬은 뒤 격문으로 대의를 외쳤다. 곧바로 장수 배농리로 들어가 당시 일진회에 속해 있던 자들이 장수 향교의 토지를 몰래 팔아먹었다는 풍문을 듣고 이들을 처단하러 갔으나 이미 그들이 도망갔기에 뜻을 이룰 수 없었다. 9월 6일 새벽에 진안군 백운면 대전리에 이르러 아침 식사를 풍족하게 하고 조양촌(朝陽村)으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선교사로 와 있던 미국인들이 이석용 의병대를 환영하였다. 9월 10일에는 진안군 마령면 좌포리[현 진안군 성수면 좌포리]에서 아침을 일찍 먹고 백지곡(白芝谷)에 진을 친 후 관촌(館村)을 습격하려 하였으나 왜경에게 들켜 전주로 후퇴하였다.

9월 12일 진안 마이산(馬耳山)에서 의병 거사 궐기 대회(義兵擧事蹶起大會)를 개최하여 그동안 모집하였던 모든 의병들을 마이산 남쪽 용암(龍巖)에 모이게 하고, 나무를 벌채하여 단을 쌓은 뒤 ‘호남 의병 창의 동맹단(湖南義兵倡義同盟團)’이라는 글씨를 쓴 깃발을 걸었다. 제단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는 각각 기치(旗幟)를 세우게 하고, 기폭(旗幅)에는 “정기가(精氣歌) 단심가(丹心歌)는 문천상(文天祥)이 순절한 시시(柴市)와 정몽주(鄭夢周)가 절사(絶死)한 선죽교(善竹橋)와 함께 비춰 충렬(忠烈)의 소거를 같이 하네(竹橋柴市烈同聲)”라고 써 놓게 하였다.

이 자리에 모인 의병이 500여 명에 달하였으며, 부근 부모 형제 장정들이 모여 산봉우리에서 파수를 보았으니 그 수까지 합치면 1,000여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이때 의진 약속 14개 조항과 의령 10조를 발표하였다. 부대원은 의병 대장에 이석용, 선봉에 박만화(朴萬華)·최덕일(崔德逸)·송판구(宋判九), 중군에 여주목(呂柱穆)·김운서(金雲瑞)·김성학(金成學), 후군에 김사범(金士範)·윤명선(尹明善)·전성학(全成鶴), 참모에 전해산(全海山)·한사국(韓士國)·이광삼(李光三), 총 지휘에 박갑쇠(朴甲釗)·곽자의(郭子儀)·임종문(林宗文), 연락에 홍윤무(洪尹武)·박성무(朴成武)·윤병준(尹秉俊), 도로 부장에 김사원(金士元)·김공실(金公實)·김성율(金成慄), 보급에 한규정(韓圭井)·박금동(朴金東)·박문국(朴文局), 운량에 오기열(吳琦烈)·조영국(趙榮國)·김학문(金學問), 기실에 전해산·한사국이었다.

대열을 정리한 후 9월 13일[양력 10월 19일] 진안 마령면 반월리에 이르러 아침을 먹고 진안읍을 공격하기 위하여 진안읍 앞산에 있는 우화정(羽化亭)에 본진을 쳤다. 이 시간 진안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들이 아침식사 중이기에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집중포화로 공격을 하니 일본 헌병 대장 호리구찌 겐지로[屈口源次郞]가 왼팔에 총탄을 맞았으며 다른 일본 병사들도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채 전주로 피신하였다. 이때 일본군들이 남기고 간 군복, 양총, 장부, 이토 히로부미가 내린 수첩, 돈 등 전리품을 많이 거두었는데 무려 20짐이나 되었다.

3. 임자 동 밀맹단 결성

이석용은 1909년 3월 6일 자기 휘하 의병들을 해산할 때까지 뛰어난 활약을 보이는데 이석용의 의병 활동은 『호남 창의록(湖南倡義錄)』에 자세히 나온다. 이를 살펴보면 이석용이 의병을 일으킨 1년 동안 때로는 500여 명, 300여 명, 아주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는 10명을 거느리고 진안·용담·장수·임실·전주·순창·광주·고성·남원·운봉·함양 등지를 누비며 활약을 하였다. 이석용의 활약은 염재(念齋) 조희제(趙熙濟)[1873년~1938]가 쓴 『염재 야록(念齋野錄)』을 통해 알 수 있다.

『염재 야록』을 살펴보면 “사람됨이 심지가 굳고 명민하였다. 의병 수백 명을 얻어 싸웠는데 수년 동안 전사한 사졸(士卒)들을 일일이 묻어 주고 제문을 지어서 제사를 치러 주어 벌판에 버려지는 시체가 없도록 하였다. 또 군대의 기강이 엄격하여 사람들에게 강제로 빼앗는 경우가 없었기에 명성이 자자하였다.”라고 쓰여 있을 정도로 이석용은 훌륭한 의병이었다.

1910년 8월 29일 결국 대한 제국이 일본에게 병탄되자 1912년 비밀 결사대를 조직하여 중국으로 건너가 활동할 것을 결의하였다. 비밀 결사대 이름은 임자 동 밀맹단(壬子冬密盟團)이라 하였고, 명단은 다음과 같았다. 단장은 이석용, 단원은 구례의 정찬석(鄭贊錫), 하동의 최제학(崔濟學)·이규진(李圭鎭), 전주의 최병심(崔秉心), 임실의 김병주(金炳周)·최창렬(崔滄烈), 진안의 정진희(鄭鎭喜)·최자운(崔子雲)·이경하(李景夏), 곡성의 안자정(安子精)·안영오(安潁五)·유인수(柳寅秀)·조영선(趙泳善)·조우식(趙愚植), 남원의 김경호(金景浩)·조성민(趙成珉)·김인식(金仁植)·허간(許幹)·허주(許柱)·허업(許業)·김학수(金學洙)였다.

이석용은 본격적 활동을 위하여 고향 친구 정동석(鄭東錫)을 찾아갔으나 정동석이 밀고하여 32세의 나이로 체포되었다. 재판을 받을 때 재판장이 기립을 요구하자 원수에 대한 경의를 표할 수 없다고 외치는 등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고 전한다. 사형 선고를 받아 1914년 4월 4일 정오 대구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호남 창의록』과 『정재 선생 문집(靜齋先生文集)』이 있다.

[묘소]

묘소는 전라남도 영암군 월출산 아래 가지동(可之洞)에 있다가, 현재는 전라북도 임실군 성수면 오봉리에 건립된 소충사에 안장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이석용은 1962년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아들 이원영도 어릴 때부터 암암리에 아버지의 의병 활동을 도왔는데, 1938년에는 아버지 유허비를 건립하고 항전 사실과 순국 정신을 후세에 계승·고취하기 위하여 제문을 낭독하며 제사를 지낸 사실이 발각되어 2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로 인하여 1990년 애족장을 받았다. 또 이원영은 아버지 이석용의 ‘의병 활동 기념비’를 전주 덕진 공원에 세웠다가, 이 비를 고쳐 고종 황제의 비를 중심으로 주위에 김구 선생 비, 순국 5열사 비, 호남 창의 대장 이석용 순국비, 3·1 운동 민족 대표 33인 비를 각각 새긴 비군(碑群)을 만들어 ‘황극단(皇極壇)’이란 이름으로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 1가 덕진 어린이 공원 입구에 세운 것이 현재 남아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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