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18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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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漢文學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이형성 |
[정의]
전라북도 순창 지역과 관련된 한문으로 된 한시, 학문, 한학 등을 통틀어 이르는 말.
[개설]
한문학은 중세를 대표하는 문학 양식으로, 중국의 한자를 표기 문자로 사용하되 우리 민족 고유의 사상과 정서를 표현하였다. 우리나라의 한문학은 중국 문학과 구별되며 한국 문학의 범주에 포함된다. 순창군의 한문학은 순창군 출신 문인이 지은 시(詩)와 산문(散文), 또는 순창군을 배경으로 하였으되 한자로 쓴 시문을 가리킨다. 특히 산문은 여러 문체를 포함한 것이다.
[순창군의 한문학자와 작품]
『순창 군지(淳昌郡誌)』에는 문인·학자들이 순창군을 무대로 읊은 200여 수의 한시 원문과 번역문이 실려 있어, 이를 통해 순창군의 산수와 문학적 정서를 엿볼 수 있다. 현재 순창군에 전하는 한문학 자료집으로는 『옥천 문집 총간(玉川文集叢刊)』이 대표적이다. 총 7권으로 이루어진 『옥천 문집 총간』에는 순창군에서 출생하였거나 순창군에서 활동한 40여 명 문인들의 문집에 대한 해제와 영인본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 수록된 인물들을 성씨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고령 신씨
고령 신씨(高靈申氏) 신말주(申末舟)는 단종(端宗)이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 벼슬을 사임하고 순창으로 물러나 남산대에 귀래정(歸來亭)을 짓고 시문 활동을 하며 순창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다. 신말주의 부인 설씨(薛氏) 역시 서화(書畵)에 능하였는데, 강천사(剛泉寺) 불사를 위해 권선문(勸善文)을 짓고 그린 그림은 매우 뛰어났다. 신말주의 손자이자 청백리(淸白吏)의 대명사로 꼽히는 신공제(申公濟)[1469~1536]는 『해동명적(海東名蹟)』을 남겨 서예술의 발전을 도모하였다.
『옥천 문집 총간』에 수록된 인물로는 『죽당집(竹堂集)』을 저술한 신유(申濡)[1610~1665]와 『초암집(初庵集)』을 저술한 신혼(申混)[1624~1656], 『저암만고(樗庵漫稿)』를 저술한 신택권(申宅權)[1722~1801]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신혼은 젊어서 중국의 시인 왕유(王維)나 두보(杜甫)의 시문을 열심히 익히고 『문선(文選)』과 『고악부(古樂賦)』를 탐독하여 시체를 두루 잘 지었다. 그런데 가정의 사적 불행으로 인하여 마음의 한을 해소하고자 억지로 시문을 짓기도 하였다. 신혼은 관직에서 파면되자 향리에서 수양하며 「연일 정좌 관심(連日靜坐觀心)」을 지었는데, 이는 정좌하여 관심·연단(鍊丹)의 수행으로 심신 연마에 대한 감상시이다. 특히 선배들과 풍류를 즐기며 지낸 「연광정(練光亭)」 작품도 유명하다. 13세 때 지은 「칠변(七辨)」은 중국 고사를 통해 교훈적인 면과 도리의 측면을 변론한 것이고, 같은 해에 지은 항룡(亢龍)은 후회가 있다는 「항룡 유회부(亢龍有悔賦)」는 『주역(周易)』 건괘(乾卦)의 한 문장을 뽑아 명철보신(明哲保身)하는 처세의 도리를 논술한 것이다. 특히 신혼의 작품 가운데 풍류가 가득한 시어는 당대 미칠 자가 없다고 하였으니 그 시문의 위상을 알 수 있다.
『옥천 문집 총간』에 포함되지 않은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1712~1781]은 조선 후기의 대실학자로, 『여암집(旅菴集)』, 『소사 문답(素砂問答)』, 『의표도(儀表圖)』, 『강계지(疆界志)』, 『산수경(山水經)』, 『도로고(道路考)』, 『산경표(山經表)』, 『증정 일본 운(證正日本韻)』, 『수차도설(水車圖說)』 등을 저술하여 순창군 한문학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특히 『소사 문답』은 흰 모래 즉 소사(素沙)에 대한 내용이다. 흰색은 빛에 의해 외형에 나타나는 색깔이고 모래는 흰색을 나타낼 수 있는 물체인데, 하나의 물건에 여러 가지 개념이 복합되어 있음을 밝힌 것이다. 이는 중국 명가(名家)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의 개념을 치밀하게 분석한 것인데, 아마도 조선 학자 가운데 유일할 것이다.
2. 남원 양씨
남원 양씨(南原楊氏)는 순창에서 대대로 세거하며 많은 문인을 배출하였는데 그 대표적 인물과 저서를 보면, 양사형(楊士衡)[1547~1599]의 『어은집(漁隱集)』, 양시진(楊時晉)[1573~1615]의 『구음 유집(龜陰遺集)』, 양시면(楊時冕)[1585~1626]의 『낙하정집(落霞亭集)』, 양여매(楊汝梅)[1601~1655]의 『화양집(華陽集)』, 양회영(楊會榮)[1681~1767]의 『삼성당 문집(三省堂文集)』, 양응수(楊應秀)[1700~1767]의 『백수 문집(白水文集)』, 양종해(楊宗楷)[1744~1815]의 『돈와 유고(遯窩遺稿)』, 양병용(楊秉鎔)[1856~1918]의 『회산재 유고(晦山齋遺稿)』, 양찬영(楊瓚永)[1858~1951]의 『만포 유고(晩圃遺稿)』, 양원영(楊瑗永)[1861~1938]의 『성암 유고(星巖遺稿)』, 양병현(楊秉鉉)[1875~1946]의 『정재 유고(靜齋遺稿)』, 양병익(楊秉益)[1890~1977]의 『구운 유고(龜雲遺稿)』 등이 있다. 양시면의 「장안곡(長安曲)」은 당시 소인배들에게 아첨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서려 있는 작품이고, 또한 소인배를 풍자한 「강남곡(江南曲)」을 보면 양시면의 문학적 기개를 알 수 있다.
유옥(柳沃)[1487~1519]의 학문과 정신을 계승한 문화 유씨(文化柳氏)의 인물과 저서로는 유호(柳灝)[1576~1646]의 『뇌천집(磊川集)』, 유동연(柳東淵)[1613~1681]의 『남간집(南磵集)』, 유광천(柳匡天)[1732~1799]의 『귀락와집(歸樂窩集)』 등을 들 수 있다. 유호의 글은 자연을 읊으면서도 법도와 감정이 잘 융화되어 있다. 특히 책문에서는 ‘예악’, ‘충효’, ‘기강과 명분’, ‘선비는 나라의 원기’를 중심으로 중국과 우리나라 역사를 비교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당시 무너진 질서를 회복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다.
청주 한씨(淸州韓氏)의 인물과 저서로는 한응성(韓應聖)[1557~1592]의 『구와실적(龜窩實蹟)』, 한태장(韓泰章)[1659~1732]의 『영회재 유고(永懷齋遺稿)』, 한치명(韓致明)[1703~1788]의 『지산 유집(芝山遺集)』, 한규섭(韓圭燮)[1848~1920]의 『지강 유집(芝岡遺集)』, 한정호(韓楨鎬)[1874~1956]의 『송파 유고(松坡遺稿)』, 한중석(韓重錫)[1898~1975]의 『취송당 유고(翠松堂遺稿)』 등이 있다. 이 가운데 한치명은 잡저의 「관세 변설(觀世變說)」에서 자연과 인사에 대한 변화를 역학적으로 설명하고, 주역적 사고로 물극필반(物極必反)을 자세히 논설하고 있어 순창 지역의 경학 사상을 알 수 있다. 한중석은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의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에 견주어 시를 창작하기도 하였다.
김인후(金麟厚)의 정신을 계승한 순창 지역 울산 김씨(蔚山金氏)의 인물과 저서로는 김시서(金時瑞)[1652~1707]의 『자연당집(自然堂集)』, 김정수(金正洙)[1830~1888]의 『경재 유고(警齋遺稿)』, 김석구(金錫龜)[1835~1885]의 『대곡집(大谷集)』, 김교준(金敎俊)[1883~1944]의 『경암집(敬菴集)』, 김재석(金載石)[1895~1971]의 『월담 유고(月澤遺稿)』 등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김정수는 자신의 사사로운 욕망을 이기어 큰 덕을 도모하고자 하는 내용의 「가경설(自警說)」을 지었으며, 책문에서는 『대학장구(大學章句)』의 ‘명덕(明德)’, 『중용장구(中庸章句)』의 ‘강(强)’과 ‘부동이경(不動而敬)·불언이신(不言而信)’, 『맹자(孟子)』의 ‘인개가이위요순(人皆可以爲堯舜)’ 등을 논술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 전주 최씨(全州崔氏) 최경악(崔景岳)[1727~1804]의 『만성 유고(晩醒遺稿)』, 안동 권씨(安東權氏) 권노수(權魯洙)[1833~1909]의 『용산 유고(龍山遺稿)』, 순창 설씨(淳昌薛氏) 설진영(薛鎭永)[1869~1940]의 『남파실기(南坡實記)』, 밀양 박씨(密陽朴氏) 박인섭(朴寅燮)[1873~1934]의 『근암집(近菴集)』, 옥천 조씨(玉川趙氏) 조용구(趙鏞求)[1882~1948]의 『괴은 유고(槐隱遺稿)』 등이 있다. 권노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한시를 주로 지으면서도 순창의 봄과 가을의 빼어난 경치를 읊기도 하였다. 박인섭은 향리에 회계당(晦溪堂)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면서 망국의 한과 울분을 시문으로 작품화하였다. 기타 최온(崔蘊)[1583~1658]은 군수로 재직하며 순창의 주요 인사들과 시문 창작을 하기도 하였다.
4. 순창 배경의 한문 소설
순창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 작품으로는 조선 전기의 문신 채수(蔡壽)[1449~1515]가 1508(중종 3)~1510년(중종 5) 무렵에 쓴 패관 소설 「설공찬전(薛公贊傳)」이 있다. 「설공찬전」은 왕권 비판과 남녀평등 주장, 윤회 화복(輪回禍福) 사상 긍정 등의 이유로 사림(士林)의 비난을 받아 1511년(중종 6)에 불태워졌는데, 이문건(李文楗)[1494~1567]의 『묵재 일기(黙齋日記)』에 수록되어 오늘날에 전해지게 되었다. 내용은, 순창에 사는 설충란에게 딸과 아들이 있었는데 딸은 시집가 얼마 안 되어 죽고 아들 설공찬마저 장가도 못 들고 병사(病死)하였다. 그런데 딸과 설공찬의 혼령이 서울에 살던 조카 설공침에게 빙의한다. 설공찬이 설공침의 몸을 빌려 저승의 삶을 묘사함으로써 윤회 화복을 주장하고, 부당한 왕권에 대해 비판하는 등 거침없는 필력을 보여 주는 소설이다.
[의의와 평가]
『순창 군지』를 보면 순창의 많은 문인들이 순창을 배경으로 많은 시문을 남겼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순창 출신의 유집(遺集)에는 시문과 경학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있어 순창의 문학 활동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설공찬전」은 한국 초기 소설의 형성 및 정착 경로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문학사적 의의를 지닌다. 앞으로 유집에 대한 치밀한 조사와 연구가 이루어진다면 순창 한문학의 위상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