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20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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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吳希吉墓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 고례리 산66-6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용엽 |
관련 인물 출생 시기/일시 | 1556년 - 오희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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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625년 - 오희길 사망 |
건립 시기/일시 | 1806년 - 오희길 묘비 건립 |
현 소재지 | 오희길 묘비 현 소재지 -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 고례리 산66-6 |
성격 | 비 |
관련 인물 | 오희길(吳希吉)[1556~1625] |
재질 | 화강암 |
크기(높이,너비,두께) | 103㎝[높이]|42.5㎝[너비]|14㎝[두께] |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 고례리에 있는 조선 후기에 세운 순창 출신 문신 오희길의 묘비.
[개설]
오희길(吳希吉)[1556~1625]은 24세 때인 1579년 집을 고창 향교 부지로 내주고, 시집간 누이가 살고 있는 순창으로 이거하였다. 이를 칭송하는 비를 고창 유림들이 세웠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니 오희길(吳希吉)은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으로서 태조의 어진과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무사히 지켰다. 이 공로로 사근도 찰방(沙斤道察訪)과 태인 현감에 제수되었다. 1619년(광해군 11) 허균(許筠)의 미움을 받아 거제로 귀양을 갔다가 1625년 귀양지에서 향년 70세로 세상을 떠났다. 선산이 있는 순창군 고례촌으로 반장(返葬)하여 양지바른 언덕에 안장하였다.
[건립 경위]
1806년(순조 6)에 오희길 묘비(吳希吉墓碑)가 건립되었다. 숭록대부 홍문관 제학 조관진이 글을 짓고 임실 현감 이익회[『근역 서화징(槿域書畵徵)』에 기록된 명필]가 썼다.
[위치]
순창군 금과면 고례리 산66-6번지 북쪽 기슭에 있다.
[형태]
규모는 높이 103㎝, 너비 42.5㎝, 두께 14㎝이다. 화강암 비신(碑身)을 좌측 기단 위에 세우고, 갓석을 얹었으며 묘 앞에는 상석을 놓았다.
[금석문]
전면에는 큰 글씨의 해서체로 ‘유명 조선국 통훈대부 행태인 현감 오공지묘(有明朝鮮國通訓大夫行泰仁縣監吳公之墓)’라 쓰고, 양 측면과 뒷면에는 잔글씨의 해서체로 새겼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의 휘는 희길(希吉), 자는 길지(吉之), 호는 도암(鞱庵), 관향은 나주(羅州)인데 공의 부친이 고창으로 이거하였다. 부친은 오언기(吳彦麒)요, 조부(祖父)는 오원(吳謜)이니 서윤(庶尹)이요, 병조 참판 나성군(羅城君) 오자치(吳自治)를 조상으로 삼고 대대로 증직과 포장이 있으니 호남의 망족(望族)이다. 공은 일찍이 하서 선생을 사모하여 그 문인 기금강(奇錦江)에게서 배웠다. 고창 향교가 저습하여 가대를 구매하기로 청하니 고궁을 지으라 하고 가대를 내어 주고 누이가 시집간 순창 고례촌으로 1579년 이거하니 향유(鄕儒)들이 비를 세워 칭송하였다.
정여립을 찾아가 널리 배우기를 청하였으나 율곡(栗谷)과 우계(牛溪)를 욕한다는 말을 듣고 크게 놀라 재빨리 편지를 써서 그가 어리석음을 열거하여 1,000여 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부터 희길의 발자취가 문하에 끊어지겠소’ 하였다. 이렇게 끊은 지 3년 만에 정여립의 모반 사건이 터지자 공을 여립의 문도라 하여 구속하고 나라에 아뢰었는데, 이에 앞서 상께서 역적 집의 문적을 살펴보다가 공의 편지를 보고 당장 풀어 주라고 명하고 역마를 보내어 올라오게 하여 누차 치하하고 후릉(厚陵) 참봉에 제수하였으나 공은 상소하여 사양하였다.
경기전 참봉으로 재임하던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태조 어진과 왕조 실록이 위기에 처하자 내장산 용굴 안에 옮겨 무사히 지켜 내었다. 그는 그 공로로 사근도 찰방과 태인 현감을 지냈으나 허균과의 불화로 1619년 거제에 귀양을 갔다. 1625년 귀양지에서 사망하여 순창 고례촌으로 반장을 하였다. 저서로 『도동 연원록』 4권, 『명대의』 등이 있다. 비문은 홍문관 제학 조진관이 짓고, 임실 현감 이익회가 썼다.”
[현황]
최근에 전라 금석문 연구회에서 비문을 탁본하여 조사하고 전주 방송에서 방영한 바 있다.
[의의와 평가]
비문의 주인공 오희길은 임진왜란 때 경기전 참봉으로 태조의 어진과 『조선왕조실록』을 무사히 지켜 낸 인물인데도 정쟁에 휘말려 거제에 귀양 가서 세상을 떠났다. 아직 오희길에 대한 연구가 별로 없어 이제라도 연구가 요구된다.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반월리에 오희길을 모신 사우인 금암사(琴巖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