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20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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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梁麟圭妻烈婦密陽朴氏旌閭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적성면 괴정리 마계 마을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승대 |
건립 시기/일시 | 1887년 - 양인규 처 열부 밀양 박씨 정려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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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양인규 처 열부 밀양 박씨 정려 현 소재지 - 전라북도 순창군 적성면 괴정리 마계 마을 |
성격 | 정려 |
양식 | 겹처마 맞배지붕 |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적성면 괴정리에 있는 효자 양인규 처 밀양 박씨의 정려각.
[위치]
양인규 처 열부 밀양 박씨 정려(梁麟圭妻烈婦密陽朴氏旌閭)는 순창군 적성면 괴정리 마계 마을 어귀의 서쪽 길가 산기슭에 있다.
[변천]
1887년(고종 24) 정려각이 세워져 오늘날에 이른다.
[형태]
양인규 처 열부 밀양 박씨 정려는 맞배지붕에 겹처마이다. 정려각에는 ‘효자 증 사헌부 감찰 남원 양인규 지려(孝子贈司憲府監察南原梁麟圭之閭)’와 ‘열녀 증 숙인 밀양 박씨 지려(烈女贈淑人密陽朴氏之閭)’라 쓰여 있다. 정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릇 어버이께 효도하고 남편에게 열행으로 따르는 것은 진실로 천리민이(天理民彝)[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윤리]의 큰 것이나 이 모두 사람의 고유한 본성으로 인하여 자식이 되고 아내 된 행실을 다 함에 지나지 않는다. 인생이 태어날 때 이러한 성품을 갖추지 않으니 없은즉 행하지 않는 이가 없을 텐데 전 역사를 보건데 능히 효열로 이름난 자가 드무니 자효 부열로써 극지에 이르지 못한즉 후세에 법 받을 것 없을 것이다.
우리 열성조 효리의 정책에 백왕이 돈상풍화와 부식 이윤을 극진히 아니함이 없는 고로 위로 조정 대신으로부터 아래로 여항 서민에까지 효열이 탁이한 자가 간간이 기록되었으니 남원 양씨 증 감찰 양공 휘 인규와 처 증 숙인 밀양 박씨가 더욱 저현한 자이다. 내가 이 고을에 임관하여 몸소 가서 그 공의와 조정의 포증을 살펴보니 공은 어려서부터 성효 근천하여 음식 거처에 심력을 다 바치고 선친이 학질로 반친에 불류기신자로다.
또한 박씨는 품자가 정숙하고 행실이 얌전하여 출가 후 시부모를 효도로써 섬기고 정성으로써 제사를 받들더니 남편이 이름 모를 병으로 여러 해를 병상에 누우니 박씨가 밤낮으로 기도하다가 마침내 운절하자 시신을 안고 통곡하다가 위연히 탄식하고 말하기를 내가 만일 죽어지면 강보에 쌓인 어린 고아는 누가 양육하며 양씨의 후가 장차 끊어질 것이라 하고 교자유방(敎子有方)[자식을 가르침에 방정함이 있다]하고 처가 유법(處家有法)하며 봉선 유후(奉先裕后)[선조를 받들고 후손에 복을 준다]하여 윤리가 유감없이 하였다. 오호라 백행의 근원인 효는 양씨가 행하였고, 여자로써 지켜야 할 열행은 박씨가 행하여 효열이 한 가문에 모였으니 진실로 그 고유의 성품으로 인하여 극지한 지경에 이르렀다 할지로다.
상지(上之) 24년 정해년에 도신을 특명하여 그 집에 정문을 내리고 세금을 면하라 하였으니 진실로 지성과 순행이 임금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않았으면 어찌 이에 이르렀으며, 또한 가히 국가 돈상부식(國家敦尙扶植)[국가가 힘써 가르치려는]의 교화가 멀지 않아 열리니 거룩하고 장하도다.
통정대부 이조 참의 정원하(鄭元夏) 기록.”
[현황]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의의와 평가]
양인규 처 열부 밀양 박씨 정려는 지역의 대표적인 효열부 정려로 지역 사회의 귀감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