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21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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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克善 |
이칭/별칭 | 유저(有諸),야곡(冶谷),문목(文穆)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최영성 |
[정의]
조선 후기 순창 군수를 지낸 문관이자 학자.
[가계]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유저(有諸), 호는 야곡(冶谷). 증조할아버지는 조곤(趙鵾), 할아버지는 조흥무(趙興武), 아버지는 조경진(趙景璡)이다. 어머니는 공주 이씨(公州李氏)로 진사 이치림(李致霖)의 딸이다.
[활동 사항]
조극선(趙克善)[1595~1658]은 충청도 예산 출신으로 처음 이명준(李命俊)을 사사하다가 그의 권고로 박지계(朴知誡)·조익(趙翼)의 문하에서 배웠다. 성리학과 예설에 밝았으며 효행으로 이름이 있었다. 1623년(인조 1) 학행으로 추천을 받아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다. 이어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 공조 좌랑, 세자익위사 사어(世子翊衛司司禦), 호조 정랑,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 이조 정랑으로 재직할 때에는 시폐(時弊)와 자강지책(自强之策)을 진언하였으며 이어 면천 군수를 잠시 지내다가 병자호란 당시에는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있었다.
호란 소식을 듣고 남한산성으로 달려가다가 천안에서 길이 막혀 부모와 함께 해도(海島)로 피난하였다. 뒤에 순창 군수, 형조 정랑, 세자익위사 사어 등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다가 1648년에 온양 군수로 나갔다. 1649년(효종 1) 10월 스승 조익의 추천으로 성균관 사업(成均館司業)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다가 1652년 6월부터 1655년 1월까지 순창 군수로 재임하였다. 선정을 베풀어 고을 백성들이 청덕비(淸德碑)를 세웠다고 한다. 1657년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된 뒤 이듬해인 1658년(효종 9)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야곡집(冶谷集)』 10권과 『야곡 삼관기(冶谷三官記)』, 『인재 일록(忍齋日錄)』 등이 있다.
[묘소]
충청남도 예산군 봉산면 시동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효종이 조극선의 학행을 흠모하여 사후에 이조 참의를 추증하였다. 신창(新昌)의 도산 서원(道山書院)과 덕산(德山)의 회암 서원(晦庵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