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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구로항일노동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000305
한자 1904年九老抗日勞動運動
영어음역 Gurojiyeok Hangirundong
영어의미역 Anti-Japanese Movement in Guro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서울특별시 구로구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배성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항일노동운동
발생(시작)연도/일시 1904년 9월 5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04년 9월 16일연표보기
관련인물/단체 민용훈|성우경|하주명|민대개

[정의]

1904년 9월 경부선 철도 부설 공사 중 구로 지역에서 일어난 항일 노동 운동.

[역사적 배경]

1898년 8월 대한제국과 일본 정부 사이에 경부철도합동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 따르면 경부철도의 부설권과 영업권을 일본이 독점하고, 철도 부지 또한 대한제국 정부가 무상으로 일본 측에 제공하게끔 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일본은 경부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하고, 1901년 8월 20일과 9월 1일 각각 서울 영등포와 부산 초량에서 기공식을 거행하였다. 3년여에 걸친 철도 부설 공사는 대부분 일본 자본의 토건 회사에서 담당하였으며, 러일전쟁의 비상 상황을 맞이하여 공기 단축을 독려, 마침내 1905년 1월 1일 경부철도가 개통되었다.

[발단]

경부철도의 부설 공사를 담당하였던 일본 토건 회사들은 숙련된 노동자들을 제외하고 공사에 필요한 노동력을 현지에서 조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본인 노동자들과 한국 노동자들의 임금 격차는 무려 3배에 달하였고, 그나마 천부장, 백부장, 십장 등의 중간 관리자가 착취하면 결국 한국인 노동자들에게 돌아가는 임금은 몇 푼 되지 않았다.

철도 공사가 착수된 직후부터 구로 지역에서는 토지 보상금과 노동 임금이 싸다는 이유로 폭동이 빈발하였다. 일본은 1904년 7월 2일부터 철도 연선에 군율을 반포하고, 마을마다 연대 책임을 지워 철도를 보호하도록 강요하였다. 공사를 방해하거나 철도에 해를 끼치는 자는 사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1904년 7월부터 철도 부설 공사에 필요한 역부를 모집해 달라는 일본 토건 회사의 요구가 경기도 시흥군에 빗발쳤고, 이에 7월 9일 수천 명의 주민들은 군청에 모여 이를 거부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후 시흥군수 박우양(朴禹陽)은 역부의 수를 30명으로 감하여 각동의 집강(執綱)에게 마을마다 1명씩을 차출할 것을 지시하였고, 여기에 드는 비용은 마을이 공동으로 부담하도록 했다. 이는 동민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을 뿐 아니라 관련 벼슬아치들이 뇌물을 받거나 임금을 착취하였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아 민심은 극도로 흉흉하였다.

[경과]

소문을 들은 구로 지역의 군민들은 1904년 9월 4일 군수의 비행을 성토하는 사발통문을 돌려 이튿날 한천교에 집결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 주모자는 일직리[지금의 광명시 소하동]에 거주하는 전 주사 민용훈(閔用勳)이었다. 사발통문을 수령한 각 동의 집강들은 이튿날 매 호당 1명씩을 차출하거나 동리 대표 및 사람들을 인솔하고 한천교로 모여들었다.

한천교 집회에서 충훈부에 사는 유학 성우경(成禹慶)이 역부 모집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자 삼막동에 사는 양인 하주명(河周明)이 나서 이를 성토하였고, 결국 이들 세 명과 집회에 모인 군민들은 관아에 모여 군수의 입회 아래 논쟁을 벌였다. 이때 군수가 불러온 일본인 석공 10여 명이 갑자기 장검과 철봉을 휘두르며 군민들을 가격하여 광명리에 사는 민검석(閔黔石)이 사망하는 등 수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를 보고 있던 군민들이 동요하여 군수 박우양과 그의 아들을 죽이고 관사를 부수는 한편, 도망가던 일본인 석공을 살해하였다. 군민들은 일단 해산하였으나, 민용훈 등은 9월 6일 광명리에서 다시 집회를 열고 43개동 집강의 연서로 군수의 죄상을 열거한 소장을 만들어 관찰부에 올렸다.

[결과]

구로 지역에서 폭동이 발생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정부는 순사를 파견하고 9월 16일 안종덕을 안핵사(按覈使)로 파견하여 자초지종을 조사하도록 하였다. 한편 일본공사관에서는 동대문에 주둔하고 있던 수비대 중 1개 소대를 급파하고 주모자들을 체포하여 헌병 주재소에 수감하였다. 9월 20일부터 10월 8일까지 계속된 안핵사의 조사 결과 당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던 민용훈, 성우경, 하주명, 민대개 등 10여 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처벌을 받았다.

[의의와 평가]

구로 지역의 항일 저항 운동은 철도 부설 과정에서 노동력 수탈을 자행한 일본과 이에 기생하였던 지방관들에 대한 인근 구로 지역 주민들의 저항을 보여준 좋은 예이다. 이러한 지역 주민의 투쟁은 이후 이 지역의 항일 독립운동으로 이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구로구지』 (구로구지편찬위원회, 1997)
  •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http://e-gonghun.mpv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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