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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이 들어서며 먹을거리도 늘어나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0B010201
지역 서울특별시 구로구 가리봉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다일

1960년대 공장이 들어서기 전까지 가리봉동 지역은 논과 밭 그리고 산밖에 없었다. 지금의 언덕배기에 집들이 들어선 자리는 모두 산이었다. 산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들은 대부분 논이고 밭이었다.

가리봉동 사람들이 말하는 ‘구종점’ 자리, 다시 말해 지금의 남구로역 4번 출구 근처는 복숭아 과수원이 있던 밭이었는데, 일제 강점기 일본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과수원을 했다. 그 언덕에서 남쪽의 안양천이나 북쪽의 도림천 쪽 언덕배기에는 집들이 들어섰고, 나머지는 논이었다.

[농촌이지만 농사짓기 어렵던 가리봉동]

농촌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농사다. 그것도 밥이 되는 쌀농사와 보리농사가 제일 중요하다. 하지만 의외로 가리봉동 노인들을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농촌이었던 가리봉동에서 농사짓기가 어려웠다는 말을 많이 했다. 그렇다면 농사짓기가 좋지 않은 땅에서 왜 계속 농사를 지었던 것일까?

인터뷰에 참여한 노인들은 80세 미만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유년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다. 당시만 해도 농사를 위해 저수 시설을 많이 갖춰 놓은 때라 논에 물 대는 일이 큰 문제가 없었다. 다만 농작물을 모두 가질 수 없고 강제로 일제가 수탈해 갔기 때문에 형편은 그리 좋지 못했다.

일제 강점기가 끝나면서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떠나자 새로운 주인이 들어와 농사를 지었다. 가리봉동도 그랬다. 1965년 발간된 『한국지명총람』에 따르면 가리봉동에 새로운 논들이 생긴 기록이 있다. ‘옥갯들’이라는 곳으로, 옛날 이 곳에 살던 어느 가난한 오씨가 근검절약하여 사들인 논이 있는 들이란 뜻이다. 가리봉동에 어렵게 정착해 논을 일구고 살아간 것이다. 이렇게 농민들이 정착한 가리봉동에서 농사짓기는 사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바로 물 문제 때문이다.

농사에서 제일 중요한 것을 꼽자면 물이다. 제때 얼마나 물을 잘 대느냐가 농사의 성패를 좌우한다. 가리봉동 골말에서 평생을 살아온 윤재병[1932년생) 씨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로 살아가던 시절의 가리봉동 얘기를 풀어 놨다.

“3공단이 전부 논이었어. 2공단도 논이고, 1공단도 마찬가지지.” 윤재병 할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구로동가리봉동 대부분의 지역이 논이었다는 얘기다. 3공단은 지금의 서울디지털3단지, 2공단은 서울디지털2단지, 1공단은 서울디지털1단지[일명 구로디지털단지]를 말하는 것이니, 구로3동과 가리봉1동, 가리봉2동, 금천구 가산동을 모두 논이라고 말한 것이다. 지금 구로구의 모습에서 논을 상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1960년대 공장들이 들어서기 직전까지 모두 농사짓던 논이었다.

“여기서 농사짓는 거는 뭐 하늘을 보고 살아야 하는 거야. 하늘에서 물이 안 오면 없어. 물 끌어 올 데가 마땅치 않아서 고생 많이 했지.”라며 농사짓던 시절 물 때문에 고생했던 이야기를 한다.

당시 가리봉동에서 물은 남쪽의 ‘말미’와 ‘모아래[또는 무아래]’라고 불리던 지역에서 넘어왔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물이 필요한 시기가 되면 말미와 모아래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이 물길을 막아 버렸다. 자기들도 물이 필요하니 어쩔 수 없다지만 가리봉동은 비 오기만 기다릴 수 없는 일이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물을 대려고 말미까지 가 보면 밤낮으로 물을 막아 놓고 돌아가며 보초를 섰다. 그래서 싸우기도 하고 사정도 해 보다가 여의치 않으면 그냥 돌아서 오는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배고프면 안양천 나물도 캐다 먹고 살았지]

하늘에서 물이 내려오지 않으니 방법이 없었다. 사실 가리봉동은 하늘의 문제만도 아니었다. 물길이 남쪽의 말미에서 가리봉동으로 흐르기 때문에 물이 흘러오길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말미 역시 농사를 짓고 살아야 했기 때문에 논을 채우고 넘치는 물만 가리봉동으로 흘려보냈다. “말미에서 물이 내려와야 모를 심지. 물을 안 주니 모내기도 못하고 그랬어. 그래서 장마가 지는 칠월칠석쯤에나 모내기를 했지. 그래도 먹긴 먹어. 200평[661.16㎡] 한 마지기에 싸래기 반 가마는 나와. 그래도 어려웠지.” 윤재병 할아버지는 그렇듯 어렵게 농사지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장마가 다 돼서야 모내기를 하고 턱없이 부족한 수확으로 끼니를 때우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태풍이라도 와서 논이 침수되면 상황은 더 안 좋았다. “태풍 와서 논이 3일만 잠겨도 그 해 농사는 망친 거야. 벼가 펴도 알이 영글지 않아. 낫으로 베어 봐도 건져지는 게 없어.”

그래도 가리봉동에서 살 길은 있었다. 안양천 덕택이었다. 안양천 변에 솟아나는 쑥도 뜯어먹고 천에서 고기를 잡아먹기도 했다. 논농사가 실패하면 방법은 산과 들에서 뜯어먹을 수 있는 나물을 찾아야 했다. 경로당에서 만난 노인들은 마치 별일 아닌 듯이 옛날 얘기를 늘어놨다. 하지만 당시엔 생존이 걸린 중요한 문제였다.

[영등포 공장에서 술지게미도 갖다 먹었죠]

농사가 실패했다고 굶을 수는 없었다. 안양천의 쑥을 뜯어먹고 물고기를 잡아먹는다지만 그것도 임시방편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영등포에 있는 공장들에는 비교적 물자가 풍부했다. 일제 강점기부터 영등포에는 공장이 많았다. 인천과 기찻길로 연결된 중심지였고 번화가였다. 가리봉동에서 영등포까지는 십리 길이었다. 그 길을 걸어 영등포 술 공장을 찾아갔다. ‘진로공장’, ‘백양공장’의 술 공장이 영등포에 있었다.

윤재병 씨는 “영등포에 술 공장 가면 모주 찌꺼기[술지게미]가 나와. 팥죽 같아. 거기 옹벽을 쳐 놓고 받았는데 찌꺼기가 막 쏟아져 나와. 그걸 깡통을 놓고 받아 왔어. 그것도 10원인가 20원인가 돈을 내야 받아 올 수 있었지. 사카린 타서 그걸 먹는 거야. 단맛에. 그런 거 먹고 살았어"

결국 가리봉동 사람들은 물이 부족한 환경을 공장에서 일하는 것으로 극복했다. 1960년대까지 비슷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1960년대 후반 구로동에 본격적으로 산업 단지가 조성되면서 가리봉동구로동 공장 사람들의 주거지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리봉동의 논과 밭은 사라지게 되었다.

[정보제공]

  • •  윤재병(남, 1932년생, 구로구 가리봉동 주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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