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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0B010202
지역 서울특별시 구로구 가리봉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다일

가리봉동은 농촌 마을이다. 논농사를 짓고 밭을 일궈 온 것이 수백 년간 이어졌다. 그래서 물에 대한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가리봉동 농지는 말 그대로 천수답이었다. 하늘에서 비가 적당히 내리면 농사가 잘되니 먹고살기 좋았다. 하지만 가뭄이 들면 딱히 먹을 것을 구하기 어려워 배를 곯아야 했고, 반대로 물이 넘쳐 홍수가 나도 배를 곯아야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바로 안양천 변에 둑을 쌓는 것이었다. 물이 많으면 둑에 담아 두고 모자라면 둑에 남은 물로 농사를 짓는 것이다. 하지만 가리봉동이 제대로 치수 대책을 세운 것은 그리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지금이야 제방을 잘 쌓고 상하수도 시설이 잘 돼 있으니 물 넘치고 그런 게 없지. 여기가 1990년대만 해도 태풍 오면 물이 찼어. 뭐 물이 찬 게 어제 오늘 얘기는 아니지. 안양천에 처음 둑을 쌓은 게 을축년 홍수 때문이야.”

가리봉동에서 대를 이어 살아온 박명재[1932년생] 씨의 이야기를 듣다가 ‘물난리’와 ‘홍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워낙에 물이 많고 습한 지역이라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사는 동네”라는 얘기를 익히 들어왔던 터라 가리봉동의 홍수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웠다.

[대홍수로 마을이 초토화되다]

1925년 을축년, 서울에 기록적인 홍수가 났다.

7월 4일부터 네 차례에 걸친 비가 748.9㎜를 기록했다. 용산의 철도 관사가 1층까지 침수됐고, 영등포와 청량리도 철도 운행이 중단됐다. 가리봉동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안양천이 범람했던 것이다.

박명재[1932년생] 씨가 어른들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을축년 이전에는 이렇다 할 둑이나 제방 시설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농사가 풍년일 수도 흉년일 수도 있었다. 하늘의 뜻이려니 하고 그대로 살았다. 하천이 가끔씩 범람해도 가리봉동 사람들은 농사를 지었다. 물이 넘쳐 흉작이 들면 보리나 산나물, 물고기 같은 것을 잡아 끼니를 때웠다. 그래도 배를 곯고 살던 동네는 아니었다.

하지만 을축년 홍수는 만만치 않았다. 서울을 초토화시킨 홍수였다. 가리봉동의 논도 못쓰게 됐다. 당시엔 복구도 쉽지 않았다. 나라에서 해 주길 기다리다가는 모두 굶어죽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다. 당시 한국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기독교계에서 안양천에 둑을 쌓는 데 일조했다.

[농촌 마을을 살려 준 교회]

박명재 씨의 이야기는 홍수에서 교회로 이어졌다. 을축년 홍수로 인해 가리봉동에 교회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을축년 홍수가 났는데 대책이 없는 거야. 먹을 것도 없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있는데 당시 양평동에 사는 노경빈 장로라고 있었어요. 이 양반이 ‘어리장사[만물장사]’를 했어요. 그래서 여기저기 왔다 갔다 했지. 어느 날 가리봉동에 와 보더니 하도 딱해서 양평동에 있는 교회에서 하마련 선교사를 같이 데리고 왔어요. 그래서 가리봉동에 교회가 생겨난 거지.”

하마련 선교사가 가리봉동에 들어온 계기가 을축년 홍수 때문이고, 수해 복구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가리봉교회가 설립되었던 것이다.

하마련 선교사는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지원을 받아 냈다. 당시 제일 싼 곡식이 좁쌀이었는데, 그 좁쌀을 들고 가리봉동으로 들어왔다. 가리봉동에서 안양천에 둑을 쌓는 수해 복구는 물론이고 주민들의 식량까지 교회에서 제공을 했다. 물론 ‘교회에 나오는 사람에 한해’라는 조건이 붙었다.

농촌 마을에 둑이 생기고 식량까지 제공해 주니 이보다 좋은 조건은 없었다. 당장 먹고살기 급한데 종교가 어느 것이든 크게 중요치 않았다. 그렇게 대홍수로 인한 피해는 가리봉교회를 통해 극복되기 시작했다.

[식량의 빛으로 공부를 하다]

박명재 씨의 이야기가 이제는 학교로 넘어갔다. 교회가 들어서더니 그 안에 강습소가 생겼다는 것이다.

‘식량 양(粮)’에 ‘밝을 명(明)’ 자를 써서 ‘양명강습소’라 불렀다. 대홍수를 겪으면서 다들 어려웠던 시기였다. 그래도 교회 덕택에 둑도 쌓았고 홍수도 극복했다. 그렇게 해서 다시 농사지은 쌀과 돈으로 사람들은 교육에 투자했다. 동네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쌀이며 돈을 걷어서 선생님을 모셔다 학교를 만들었다.

1900년대 초반 가리봉동 인근에는 시흥국민학교가 유일한 초등 교육 기관이었다. 박명재 씨가 1932년생인데 32회 졸업생이니 역사가 오래된 학교였다. 면 단위 지역에 학교가 하나라 모든 아이들이 들어가질 못했다. 시험을 봐서 선발하던 학교였다. 그래서 시흥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사전 교육을 양명강습소가 담당했다.

박명재 씨가 다닐 때 양명강습소는 총 100명이 넘는 학생이 있는 큰 학교였다. 지금 가리봉교회 앞의 목욕탕에서 마주 보이는 자리에 양명강습소가 자리했다. 가리봉동의 교육에 큰 역할을 했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다방으로 변해 있었다.

[정보제공]

  • •  박명재(1932년생, 구로구 가리봉동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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