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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유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000459
한자 張維
영어음역 Jang Yu
이칭/별칭 지국,계곡,묵소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구로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남달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생년 1587년연표보기
몰년 1638년연표보기
본관 덕수(德水)
대표관직 우의정

[정의]

조선 후기 구로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

[가계]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지국(持國), 호는 계곡(谿谷)·묵소(默所). 아버지는 판서 장운익(張雲翼)이며, 어머니는 판윤 박숭원(朴崇元)의 딸이다.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의 사위이며, 효종인선왕후(仁宣王后)의 아버지이다.

[활동사항]

장유(張維)[1587~1638]는 1605년(선조 38) 사마시를 거쳐 1609년(광해군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호당(湖堂)에 들어갔고 이듬해 겸설서(兼說書)를 거쳐 검열·주서 등을 지냈다.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파직되고,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녹훈되고 봉교를 거쳐 전적과 예조·이조의 낭관(郞官)을 지내고, 그 뒤 대사간·대사성·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공주로 왕을 호종한 공으로 이듬해 신풍군(新豊君)에 수봉, 이조참판·부제학·대사헌 등을 지내고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로 왕을 호종하였다. 그 뒤 대제학으로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겸임하였고, 1629년 나만갑(羅萬甲)을 신구(伸救)하다가 나주목사로 좌천되었다. 다음해 대사헌·좌부빈객(左副賓客)·예조판서·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631년 원종추숭론(元宗追崇論)이 대두되자 불가함을 주장하고 전례문답(典禮問答) 8조를 지어 왕에게 바쳤다. 1636년 병자호란 때 공조판서로 최명길(崔鳴吉)과 더불어 강화론을 주장하였다. 이듬해 예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의 부음(訃音)으로 18차례나 사직소를 올려 끝내 사퇴하였고 장례 후 과로로 병사하였다.

[학문과 사상]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양명학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천문·지리·의술·병서 등 각종 학문에 능통하였고, 서화와 문장에 뛰어나 이정구(李廷龜)·신흠(申欽)·이식 등과 더불어 조선 문학의 사대가(四大家)라는 칭호를 받았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계곡만필(谿谷漫筆)』, 『계곡집(谿谷集)』, 『음부경주해(陰符經注解)』가 전한다.

[상훈과 추모]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에 진봉되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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