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004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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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得恭 |
영어음역 | Yu Deukgong |
이칭/별칭 | 혜풍(惠風),혜보(惠甫),영재(泠齋),영암(泠庵),가상루(歌商樓),고운당(古芸堂),고운거사(古芸居士),은휘당(恩暉堂),류득공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상열 |
[정의]
조선 후기 구로 출신의 문신이자 실학자.
[가계]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혜풍(惠風)·혜보(惠甫), 호는 영재(泠齋)·영암(泠庵)·가상루(歌商樓)·고운당(古芸堂)·고운거사(古芸居士)·은휘당(恩暉堂). 문양부원군(文陽府院君) 유자신(柳自新)의 8세손으로 아버지는 유춘(柳瑃)이다.
[활동사항]
유득공(柳得恭)[1749~1807]은 1773년(영조 49) 생원시에, 이듬해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779년(정조 3) 규장각검서(奎章閣檢書)가 되었으며, 1786년(정조 10) 포천현감과 제천군수, 1788년 양근군수, 1792년 가평군수를 지냈다. 외직(外職)에 있으면서도 규장각검서의 직함을 가졌으며 세상에서 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서이수(徐理修)와 함께 4검서라 하였다. 유득공은 북학파의 거장 박지원의 제자로 이덕무 등과 더불어 실사구시(實事求是)로 산업 진흥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박제가·이덕무·이서구(李書九)와 함께 한학사가(漢學四家)라고도 불렸다.
[학문 및 사상]
유득공은 시문에 뛰어났으며, 규장각검서로 있었기 때문에 궁중에 비치된 국내외의 자료들을 접할 기회가 많아 다양한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저서를 남겼다. 특히 한국사의 독자적인 발전과 체계화를 위해 역사 연구 대상을 확대하였다. 『발해고(渤海考)』에서 한반도 중심의 역사 서술 입장을 벗어나서 고구려의 옛 땅인 요동(遼東)과 만주 일대를 민족사의 무대로 파악하였으며, 고구려의 역사 전통을 강조하였다.
또한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를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이를 한국사의 체계 안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신라와 발해가 병존하였던 시기를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로 파악하였다.
『발해고』는 군고(君考)·신고(臣考) 등 9고(考)로 되어 있으나 권(卷)도 나누지 않은 단권(單卷)의 간략한 내용으로 되어 있으며, 내용도 세밀히 검토하면 잘못 기술된 부분이 많아 학문적 수준은 그다지 높지 않다. 그러나 발해사를 최초로 체계화하고 이를 한국사의 체계 안에서 파악하려는 이론의 제시와 그 의도에는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탈피하여 주체 의식의 확립에 노력하던 실학파의 학풍이 엿보인다.
또한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는 단군조선에서 고려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이 세운 21개 도읍지의 전도(奠都) 및 번영을 읊은 43편의 회고시로서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민족의 주체 의식을 되새겨 보려는 역사의식이 잘 나타나 있다. 『경도잡지(京都雜志)』는 조선시대 한양의 생활과 풍속을 전하고 있어 민속학 연구의 주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동시맹(東詩萌)』, 『병세집(竝世集)』, 『열하기행시주(熱河紀行詩註)』, 『연대재유록(燕臺再游錄)』,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 『경도잡지』, 『이십일도회고시』, 『발해고』 등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시 낙양동 산120번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