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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000537
한자 洪振道
영어음역 Hong Jindo
이칭/별칭 자유,청회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구로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양윤모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생년 1584년연표보기
몰년 1649년연표보기
본관 남양(南陽)
대표관직 판중추부사|부평부사

[정의]

조선 후기 구로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

[가계]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자유(子由), 호는 청회(聽檜). 아버지는 동지돈령부사 홍희(洪喜)이며, 어머니는 능안부원군 구사맹(具思孟)의 딸이다. 아버지 홍희인조의 외조부인 구사맹(具思孟)의 사위로, 인조와는 이종사촌 형제간이다.

[활동사항]

광해군이 이복동생인 능창군(綾昌君)을 역모로 처형하자 능창군의 형인 능양군(綾陽君)[뒤의 인조]이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집을 반환하자, 홍진도는 자기 집을 능양군에게 주어 기거하게 하였다. 능양군이 아버지 상을 당했을 때도 광해군의 의심이 있었지만, 이에 개의치 않고 끝까지 장례를 치렀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한 공으로 공조좌랑에 특진되고, 이듬해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에 책록되어 남양군(南陽君)에 봉하여졌다. 1625년에는 구로 지역을 관할하는 부평부사를 지냈으며, 이어 오위도총부부총관을 거쳐, 1631년 공주목사가 되었다. 이 때 정사를 잘 살펴 훌륭한 목민관이라는 평을 얻었으며, 이 공으로 가의대부에 올랐고, 한성부우윤을 역임한 뒤 남양부사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였고, 이듬해 자헌대부에 올랐다. 1644년 모친상을 마친 뒤 도총관(都摠管), 지돈령부사 겸 지의금부사(知敦寧府事兼知義禁府事)를 거쳐, 이듬해 사은 겸 주청부사(謝恩兼奏請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35년 병자호란 때 신경진 등과 화의(和議)를 주장하였으며, 그 뒤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상훈과 추모]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고 남양부원군에 추봉되었으며, 충목(忠穆)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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