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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옌벤조선족마을, 중국동포타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001668
영어의미역 Choseon Race Town in Guro-gu
분야 지리/인문 지리,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서울특별시 구로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용필

[개설]

서울특별시 구로구는 중국 동포 밀집 거주 지역이다. 2008년 10월 법무부 통계에 따르면 구로구에 거주하는 중국동포는 총 25,957명이다. 그 중 가리봉동에 7,712명이 살고 있고, 구로동을 비롯한 6개 동에 16,94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또한 2009년 7월 행정안전부에서 실시한 외국인 주민 현황 조사 결과에 따르면, 구로구에 거주하는 중국동포는 32,456명으로 1년 사이에 7천 명 정도 늘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구로구에 거주하는 이주민의 수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렇게 구로구에 많은 중국동포가 살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부터이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친척 초청 또는 여행, 공무 등 다양한 방식으로 한국에 들어온 중국동포들은 입국 후 한국에 그대로 남아 건설 현장, 식당 등에 취업하게 된다. 옌벤에서 온 중국동포 노동자들은 서울에서 가장 값싼 방을 구할 수 있는 가리봉동으로 자연스럽게 몰려들게 되었는데, 이것이 구로구가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중국동포 밀집 거주 지역으로 부상하게 된 계기이다. 심지어 가리봉동에는 옌벤 지명을 상호로 사용하는 식당과 식품점, 노래방 등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서울의 옌벤조선족마을이란 별칭을 얻게 되었다.

[구로구의 변천과 중국동포타운]

중국동포들이 한국에 입국하게 된 주요 배경으로 들 수 있는 것은 1988년에 개최된 서울올림픽이다. 올림픽 개최는 한국의 국제적 위신을 상승시켜 한국에서의 삶에 외국 동포들이 매혹을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발맞추어 1992년 한·중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중국동포들의 한국 입국이 쉬워지게 된 것도 하나의 요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1990년대로 들어서 일산, 분당 등 신도시 개발로 인해 건설 인력 수요가 늘어남으로써 노동력의 보충이 필요한 환경이 조성된 것도 요인이 되었다.

1992년 법무부에서 6월 10일부터 7월 31일까지 불법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들에게 자진 신고를 유도했는데, 이때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 노동자는 10만 명 이상이었다. 그리고 이 기간에 신고한 외국인 노동자는 6만 명이었는데, 이 중 중국동포가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당시 국내로 들어온 중국동포 노동자 중 상당수가 자신들의 거주지를 구로구로 정하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렇다면 이들이 구로구로 모여들게 된 배경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구로구 거주민들의 변천사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1965년 한·일 국교 수립 이후 구로동에 있던 군용지 466,115.70㎡가 재일동포 전용 공업 단지로 사용되면서 한국 최초의 수출 공단인 구로공단이 탄생하게 되었다. 당시 구로동은 지방에서 올라온 난민들이 삶의 터전을 이룬 집단 주거지였다. 구로공단은 1967년 4월 1일 준공되었는데, 당시 공단에 입주한 기업의 70%는 재일동포들이 투자해서 세운 공장들이었다. 여기서 밤낮으로 생산된 제품들은 100% 수출 대상이었다. 당연히 이곳 구로공단에서 생산된 제품들은 1980년대 중반까지 한국 전체 수출의 10%를 차지했으며, 구로공단은 명실공히 한국 경제가 발전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구로공단이 수출의 산실로 부상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젊은 노동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공단 주변 지역에 집단 거주지를 형성하게 되면서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자 영등포구에 속하던 21개 행정동이 분리되어 1980년 4월 1일 구로구가 설립되었다. 당시 영등포구구로동, 가리봉동, 독산동 등 남부 지역을 나누어 구로구를 신설한 것이다. 구로구에 편입된 지역은 구로동, 가리봉동, 독산동, 시흥동, 고척동, 개봉동, 오류동, 궁동, 온수동, 천왕동, 항동신도림동 일부 지역이었다.

1970년 구로공단이 성장하면서 가리봉동 일대는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1970년대 남부순환도로가 개통되기 전까지는 현 금천구 가산동 83번지 일대가 이 지역의 번화가였다. 그러나 1970년대 중후반 고가 도로가 생기면서 지금의 금천구 지역과 구로 지역이 단절되었다. 이때부터 공단 노동자들은 가리봉동 127번지 일대 남구로역 길을 따라 출근을 하기 시작했다. 그 후 이곳과 현 가리봉 2동사무소를 두 줄기로 잇는 일명 먹자골목을 중심으로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상황을 잘 기억하고 있는 가리봉동 충청컨설팅의 정명섭은 “매달 10일경 월급날이 되면 가리봉 먹자골목 일대는 인파에 떠밀려서 걸어 다니기도 힘들 만큼 공단 노동자들로 북새통을 이뤘다.”고 회상하였다. 그는 또 “당시 먹자골목에는 떡볶이, 호떡, 부침개 등의 분식 점포가 주를 이뤘는데, 상인들이 그야말로 앉은 자리에서 돈을 긁어모았다.”며 당시 이 지역 상권이 얼마나 호황을 이루었는지를 말해 주었다.

1980년대로 들어서 구로구는 노동자들의 도시로 대외적인 이미지가 굳어졌다. 1980년대 말 구로구 주민들의 연령 구성비는 15~29세의 비중이 47.0%로 서울 시내 구별로 볼 때 젊은이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타 지역에 비해 높은 수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구로구 내 직장을 가진 인구 비율은 49.6%로서 중구 다음으로 높았다. 1980년대 이후 구로구의 인구는 꾸준히 증가하였다. 1990년에는 74만 8072명으로 증가의 절정을 이룩했다. 그러나 1990년대 공단이 쇠락하면서 중반까지 내리 감소세를 보였다.

구로구의 남녀 성비 및 전출입 상황도 공단의 흥망성쇠와 그 궤를 같이한다. 1970~1980년대 시골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돈을 벌기 위해 구로공단에 취업한 여성 노동자들은 공장 내 기숙사나 당시 벌집촌이 형성되어 있던 구로 3동가리봉동 일대에서 삶의 터전을 마련하여 1987년까지 구로 지역의 여초 현상[여성〉남성]의 원인이 되었다. 여초 현상이 지속된 1980년대 후반까지는 구로구를 떠나는 인구보다 구로구로 이사해 들어오는 인구가 더 많았다. 이처럼 구로구의 남녀 성 비율과 전출입 인구 이동 등은 구로공단의 발전사와 맥을 같이해 온 것이다.

그러나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하여 1990년대에 들어선 구로공단은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공단 지역 일대의 땅값과 임금이 급격하게 오르면서 과거 값싼 노동력을 활용한 수출 지향적 경공업이 사향 길로 접어들었다. 구로공단 내 대규모 제조업 공장들은 해외로, 지방으로 이전을 서둘렀고, 이로써 구로공단 지역에는 텅 빈 공장들이 늘어갔다. 그리고 이들이 빠져 나간 자리에는 대기업 혹은 중소기업과 하청 관계를 맺은 소기업, 영세 소기업들이 임대인으로 들어왔으나, 이들 기업의 영세성으로 노동자들의 수도 급감했다. 그리하여 구로공단의 침체와 공동화를 막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1997년 7월 18일 ‘구로산업단지 첨단화계획’이 고시되었다. 이로써 구로공단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탈바꿈하고, 2009년 현재까지 첨단 산업 단지로 변신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노동자 도시로서의 구로구는 주택 형태에서도 서울 시내 다른 지역과 차별성을 지닌다. 구로공단 인근 노동자 밀집 지역인 가리봉동구로 3동 일대에 들어선 일명 ‘닭장집’과 ‘벌집’이 그것이다. 그러나 구로공단 노동자들이 머물던 ‘닭장집’과 ‘벌집’은 1990년대 이후부터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한 조선족으로 채워지기 시작하였다. 2000년대 들어서 가리봉동이 옌벤조선족마을로 급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옌벤조선족마을 가리봉동]

2002년 3월 17일에 MBC 특집 드라마 「가리봉엘레지」[기획 최창욱, 연출 박복만, 극본 이기원] 1, 2부가 연속 방영되었다. 이 드라마는 가리봉동 일대에 모여 살던 불법 체류 중국동포들의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이 드라마가 방영될 당시, 법무부는 2002년 한일월드컵 대회를 앞둔 3월 12일 ‘불법 체류자 종합 방지 대책’을 발표하고 불법 체류자 자진 신고 기간[2002년 3월 25~5월 29일]을 설정하였다. 자진 신고자에 대해서는 2003년 3월 31일까지 출국을 유예해 준다는 정책이었다.

이것은 월드컵을 앞두고 테러 방지를 위해 불법 체류자의 현황을 조사하기 위한 목적이 컸는데, 어쨌든 법무부에 공식 집계된 불법 체류자 27만 6000명 중 93%인 25만 6,000여 명이 자진 신고를 해서 준합법적 생활을 하게 되었다. 당시 중국인 15만 1000명이 신고했고, 그 중 중국동포가 10만 명을 넘게 차지하였다. 이렇게 신고를 한 외국인과 중국동포들은 2003년 3월 말까지 자진 출국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구입한 비행기표 또는 배표와 함께 여행증을 소지하고 오면 여권[여행증]에 출국 유예 기간을 찍어 주었다.

이 조치는 가리봉동에 새로운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1990년대 초부터 가리봉동에 거주하는 중국동포가 증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거의 대부분이 불법 체류 상태였기 때문에 거주민을 통계로 집계할 수 없었고, 중국 식당 등도 뒷골목에 자그마한 규모로 생겨 외부에는 거의 노출되지 않았다. 그러나 2002년 법무부 구제 정책이 발표된 이후 가리봉동에는 결혼 또는 친척 초청 등으로 이주해 와 한국 국적을 취득한 옌벤 출신 중국동포 여성들이 본격적으로 옌벤의 고향 지명을 딴 식당을 개업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동포 노동자들이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안 한국인들이 중국동포를 상대로 노래방을 개업하여 성업을 이루었다. 또한 국제전화방, 핸드폰가게 등이 중국어 간판을 내걸고 문을 열게 되면서 가리봉동은 본격적인 옌벤족마을의 풍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곳을 찾는 중국동포들은 가리봉동이 중국 옌벤의 연길시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그 후 이곳은 중국동포들에게 필요한 생필품과 생활 정보를 제공해 주는 중심지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2007년 후반기 동안 가리봉동을 집중 연구한 서울대학교 도시계획학과 정문수 교수는 논문에서 “2007년 현재 가리봉동 거주 조선족은 6,000여 명으로 추산……[가리봉 주민인구 1만 5,000여 명] (중략) 가리봉동에 형성된 조선족 대상 상점은 총 140여 개…… (중략) 음식점은 64개, 노래방은 23개…… (중략) 술집, 다방, 식품잡화점, 화물 운송 여행사, PC방 및 오락실, 국제전화방, 직업소개소 등이 분포되어…….”라고 소개하고 있다. 중국동포를 대상으로 하는 잘 알려진 교회만도 3개 정도 들어설 정도로, 2000년대에 들어서 가리봉동은 한국에 사는 중국동포들의 대표적인 지역으로 언론에서도 집중 조명되어 왔다.

[차이나타운인가, 중국동포타운인가]

가리봉동 옌벤조선족마을은 독특한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이곳은 외형상 차이나타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구성원 대부분이 중국동포이기 때문에 차이나타운으로 규정짓는 것에는 어폐가 있다. 그 이유는 중국의 조선족마을은 여타 한족 마을과는 다른 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 내에서 동북 3성의 조선족 농촌마을에서 이주해 산둥반도 연해 도시로 진출한 조선족 집거지는 중국에서 ‘코리아타운’으로 불리고 있다.

가리봉동에 형성된 조선족 타운의 상권을 중심으로 형성된 문화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식당을 위주로 한 먹을거리 문화와 노래방을 위주로 한 놀이 문화가 그것이다. 조선족 식당에서 파는 음식은 구육관(拘肉官), 양고기꼬치, 왕순대, 만두, 초두부, 훠구어[샤브샤브] 등이다. 이런 음식들 중에는 차이나타운에서 맛볼 수 있는 중국식 음식도 있지만, 사실 알고 보면 조선족만이 즐겨먹는 음식들이다. 그리고 식당 명칭도 한민족의 상징이 활용되고 있는 면면을 발견하게 된다. 두만강식당[초두부, 콩장 등], 압록강반점[개고기, 꿩탕 등], 장백산 양육관[양꼬치구이 등], 아리랑분식[칼국수 등], 아리랑전육관(阿里郞全肉館)[동북 지방 가정식 요리, 양·개 샤브샤브 등], 천지반점[냉면, 조류 등], 진달래냉면, 아리랑커피숍 등이 그것이다.

노래방을 중심으로 형성된 놀이문화는 거의 한국식이다. 조선족은 중국 가요를 부르기도 하지만 가장 즐겨 부르는 노래는 ‘뽕짝류’의 한국 가요이다. 가리봉동이 차이나타운의 거리와는 다른 면모가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가리봉동에서는 2003년 8월부터 『가리봉중국동포타운』이란 이름의 신문이 발간되기 시작하였다. 현재는 『중국동포타운신문』으로 이름을 바꿔 발행하면서 기사 곳곳에서 차이나타운이 아닌 중국동포타운으로 지칭하는 횟수가 늘어났다. 이것은 중국동포타운이 차이나타운과 차별성을 두면서 점점 발전해 가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구로 지역 중국 동포들의 생활상]

가리봉동 중국동포타운지하철 남구로역 3번과 4번 출구에서 시작된다. 4번 출구에서 나오자마자 왼쪽 길로 들어서면 가리봉 2동사무소로 이어지고 남부순환도로를 육교를 통해 건너가면 가산디지털단지역[구 가리봉역]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3번 출구에서 나와 가리봉오거리로 이어지는 대로변을 따라 내려오면 가리봉 1동의 가리봉시장이 있는 시장거리로 이어진다.

이렇듯 남구로역 3·4번 출구로 나오면 즐비하게 늘어선 중국 지명과 중국어로 된 식당 간판들이 이색 풍경을 이룬다. 그리고 새벽 5시경이 되면 이 거리는 새벽 인력시장이 개설되는 진풍경을 이룬다. 남부인력소개소, 대명인력소개소 등의 간판 아래 막일꾼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이들이 크고 작은 건설 현장으로 떠나고 나면 새벽 찬 공기를 녹이기 위해 지펴 놓은 모닥불의 잔해 흔적을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다.

가리봉동은 고향을 떠나 무슨 일을 해서라도 돈을 벌어 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노동자들의 삶의 터전이자,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꿈을 키워 가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서민들의 삶을 그린 소설과 영화의 배경이 되었다. 대표적으로 1997년 양귀자 소설집 『원미동 사람들』에서는 비오는 날이면 밀린 임금을 받기 위해 가리봉동으로 가는 막일꾼의 이야기가 나오고, 신경숙의 단편소설 「외딴집」은 1980년대 초 구로공단 여공들의 가리봉동 쪽방의 일상생활을 생생하게 그렸다. 그리고 시인 박노해는 「가리봉시장」이란 노동자들의 애환이 담긴 시를 노래하였다. 이처럼 1970~1980년대 가리봉동은 한국 노동자들의 제2의 고향과 같은 곳이었으며, 이들의 현실을 대변해 주는 곳이기도 하였다.

1990년대로 들어서 가리봉동은 또 다른 노동자들의 생활 모습을 담기 시작하였다. 중국 동북 3성, 곧 지린성[吉林省]·헤이룽장성[黑龍江省]·랴오닝성[遼寧省]에서 온 중국동포들의 ‘코리안 드림’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중국동포가 가리봉에 많이 산다는 것이 외부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말부터이다. 그러면서 가리봉은 중국동포 밀집 거주지의 대명사가 되었다.

언론과 방송에서 ‘가리봉 조선족타운’이라 하면 구로구 가리봉동만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가리봉동 이외에 영등포구 대림동, 금천구 가산동과 독산동 등 중국동포들이 밀집 거주하고 있는 지역 일대를 통칭하는 대명사로 통하게 되었다. 2000년 초 이 일대에 거주하는 중국동포는 3만여 명 정도로 추산되었다가 2009년 7월 행정안전부 통계에 의하면 10만여 명 이상이 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가리봉동은 중국동포들이 한국에 와서 기초를 다지면서 한국 생활에 정이 들어가고 좀 더 나은 생활을 하면 환경이 더 좋은 곳으로 이주하는 전형적인 이주민의 마을이다. 그만큼 외지에서 몰려오는 다양한 사람들이 얽히고설켜 생활하는 곳이라 크고 작은 사건들이 많이 일어난다.

그러다 보니 한국에 온 이방인들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국인들에겐 낯선 것이 많고 한국 언론 방송에 불법 체류자가 많이 사는 곳, 외국인 범죄가 발생하는 곳으로 자주 비치어 좋은 이미지보다는 어둡고 위험스런 곳으로 비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래서 중국동포들이 모여 사는 가리봉동은 단속 제1 대상이 되어 상권이 성장하지 못하고 주춤하는 현상을 볼 수 있으며, 2003년부터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되어 정착하려는 사람보다 언젠가는 떠나가야 할 곳이라는 불안감이 잠재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였다.

한국에 와서 생활하는 중국동포의 이미지를 대변하는 지역으로서 가리봉동의 입지는 컸다. 그래서 가리봉동 지역 상인들뿐 아니라 중국동포들도 가리봉동의 좋은 이미지를 보여 주기 위해 2004년에는 가리봉시장 거리에서 중국동포와 지역민이 함께 하는 ‘설날노래자랑’, ‘추석맞이한중노래자랑’을 2005년까지 몇 차례 실시하기도 했다. 또한 가리봉동을 화합과 공존의 중국동포타운의 거리로 조성하자는 취지에서 2004년 9월 4일, 가리봉동 동포거리 ‘화합과 공존의 거리’ 선포식 및 실천 덕목 10개 항 선서식 행사를 가졌다. 10개 공동 실천 덕목은 ‘화합과 공존의 거리’를 만들기 위한 10개 공동 실천 덕목으로서, 중국동포뿐 아니라 한국 지역민들도 함께 지켜야 할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항상 가족을 생각하자/ 2. 희망을 품고 열심히 일하자/ 3.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자/ 4. 법과 기초질서를 지키자/ 5. 주변 환경을 깨끗이 하자/ 6.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며 살자/ 7. 웃는 얼굴로 만나고 헤어지자/ 8. 서로 도우며 신뢰를 쌓자/ 9. 하루에 한 번씩 좋은 생각을 갖자/ 10. 좋은 친구가 되자

2005년과 2006년 두 차례에 걸쳐 한국 정부는 ‘동포 귀국 지원 프로그램’을 시행하였다. 이 프로그램은 불법 체류 중인 중국동포들이 자진 출국하면 1년 후 합법적으로 입국하여 한국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일종의 구제 정책이다. 이 프로그램 시행으로 가리봉동 중국동포의 생활상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2년에 걸쳐 시행된 구제 정책과 아울러 2007년 3월 4일부터 시행된 방문취업제[H-2]로 인해 가리봉동은 한때 중국으로 돌아간 중국동포들이 많아 공동화 현상을 보이다가 다시 활기를 찾는 곳이 되었다. 2009년 말 현재 가리봉동에는 중국동포 위주로 외국인자율방범대가 전국 최초로 결성되어 활동을 하고 있으며, 이곳으로부터 동포 단체가 결성되어 한국에 체류하는 중국동포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중국동포타운의 의의]

가리봉동 옌벤조선족마을을 중국동포타운으로 만들자고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때는 2003년 8월 21일 가리봉동중국동포타운추진위원회가 발족되면서이다. 당시 취지문에서는 “가리봉동은 중국의 북방 문화와 한국의 대중문화가 한데 어울린 독특한 풍경을 지닌 곳으로 중국동포들에게는 제2의 고향이며, 동북 3성의 고향 사람들이 전국 각지로 뿔뿔이 흩어져 일하다가 주말이면 잠시 만나 고향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만남의 장소”로 설명하였고, “가리봉은 조선족과 한족, 그리고 한국인이 한데 어울려 사는 동북아의 축소판으로, 전 세계에 화교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차이나타운이나, 현재 국내에 있는 차이나타운과는 사뭇 다른 역동성이 살아 숨 쉬는 곳”으로 규정하였다.

중국동포타운이란 말은 중국동포 밀집 거주 지역의 특징을 말해 준다. 중국에서는 코리아타운의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을 보여 주었고, 한국에 와서는 차이나타운의 구성원으로서 인식되는 중국동포들의 모습을 단적으로 규명하여 말하기에는 복잡한 요소들이 있다. 따라서 중국동포타운이란 말은 이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는 개념이기 때문에 이 명칭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0.12.31 내용수정 연변족마을 → 연변조선족마을로 수정
2020.12.31 내용수정 옌벤족마을 → 옌벤조선족마을로 수정
2017.12.04 오타 수정 명실공이 -> 명실공히 파별성 -> 차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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